인간은 현재가 불만스러울 때 영광스러운 과거를 되새긴다고 하죠.
단언하건대 저는 저의 과거를 '영광스럽게' 기억하는 유형의 인간은 아닙니다. 현재가 불만스럽다고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회상에 젖는 타입도 아니고요. 근 몇 년 간 과거는 저에게 떠올릴수록 부끄러운, 이미 한참 지나와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예전 사진은 볼 일도,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다만 이따금 루키즘에 절어 있는 사람들에게 저의 과거 사진을 보여준 다음 보이는 표정을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제 과거는 '예쁘고' 그 '예쁨'을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수십 가지의 화장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건 없다며 할인하는 화장품을 쓸어 담아 구매하고, 넓은 어깨를 가리기 위해 허리께까지 머리를 기르고, 굵은 다리가 조금이라도 얇아 보일 수 있도록 짧은 치마를 입고, 아무리 애써도 말라지지 않는 몸을 원망하며 다이어트 약도 지어다 먹고요. 그 노력의 결과는 거울도 사진도 외면하게 되는 자기혐오와 그치지 않는 채찍질의 늪이었습니다. '예쁨'에 그만은 없어요. 언제나 더, 더, 더만 있을 뿐.
당신의 주위에 거울이 있나요? 거울을 마주보는 일이 영 계면쩍고 불쾌하지는 않나요? 저는 이제 거울을 잘 들여다보지 않지만, 간혹 마주치게 되어도 그냥 씨익 웃어주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거울을 얼굴과 몸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추한 곳을 찾아내는 도구로 사용했다면 지금은 거울을 그저 비추는 근본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저에게 크나큰 자유를 선사했답니다.
저는 제 인생의 어느 때보다 뚱뚱한 몸, 짧다란 머리에 화장기는 전혀 없는 얼굴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남자도 저를 연애의 대상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간택, 혹은 발견당하는 것을 로맨틱의 전형으로 생각하며 은밀히 욕망했는데요. '연애', '로맨스'에 대해 고찰을 거듭할수록 발견당하는 피동적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거든요.(반박하고 싶을 시 고개를 들어 뉴스 사회면을 보세요) 연애, 로맨스, 결혼을 욕망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에 섞이면서 저는 저도 모르게 무력함을 학습했습니다. 나 혼자 다르다는 건 굉장한 피로감을 주거든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의 우물을 반복적으로 길어내는 기분이랄까요?
누가 물으면 늘 비혼, 비연애주의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왜 연애마저 하지 않냐는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외롭지 않다고 짧게 이야기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둘이서 외롭느니 혼자 가끔 외롭고 말겠다고 진솔히 이야기하면 설교가 이어집니다. 그동안 쓰레기만 만나서 그런 것이고, 어딘가에는 제 짝이 있을 거래요. 그때마다 궁금해져요. 나의 운명의 짝이여, 당신은 그토록 나를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까? 그래서 나는 타인의 말에 휘둘려 마음의 허들을 낮춰야 하나요? 무려 '운명'의 짝이라면 나는 당신이 퍽 매력적이고 설득적인 인간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당신도 나를 존중해 전력을 다하길 바랍니다.
타인과의 연애에 준비된 상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상태를 이해하는 동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아주 어렵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인생은 그럭저럭 흘러간다'라는 대전제를 이해하기에 어려운 사람이 아직 훨씬 많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정말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기'를 멈추면 비로소 널부러진 자기 자신의 잔해가 보이고 그 조각을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존'이라고 부르는 그것이요. 자신에게서 신뢰를 얻게 되면 타인이 뿜어내는 독에 내성이 생깁니다. 별 것이지만, 별 것이 아닌 게 돼요. 분명히 괜찮아집니다. 그렇게 생에 애정이 생기죠.
그러고 나면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싶어져요. 저는 운이 좋게 멋진 사람들을 찾아서 종종 만나곤 합니다. 적게는 달에 한 번, 운이 좋으면 달에 두세 번은 만나거나, 이마저 여의치 않으면 자주 연락을 해요. 인상 깊었던 책이나 영화를 추천하기도 하는데, 덕분에 지평이 상당히 넓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서로가 서로다울 수 있게 든든히 응원하는 느슨한 연대감을 감각으로 익힐 수 있었어요.
그리하여 저는 계속, 잘, 살 것 같습니다.
당신의 오늘은 어때요?
부디 어제를 되새기며 '만약'의 늪에 빠지거나 오늘의 당신을 미워하지 않길 바라요.
안녕. '내일' 만나요.
일전의 레터에서 복학생 시리즈로 돌아오겠다고 끝맺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긴 공백을 깨고 찾아가는만큼, 시리즈 소설보다는 편안한 에세이를 보내드리고 싶었어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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