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홀린 듯 한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정이 내 엄지손가락을 물었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성글게 쥔 주먹 안에서 요정이 필사의 저항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새리는 특유의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예뻐. 요정은 한새리가 아닐까? 솔직히 이건... 너무 못생겼잖아. 내 주먹을 가만히 보다가 결국 결정을 내리고 한새리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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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교실이었다. 수학 시간에 잠깐 존다는 게 깊이 잠든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친구들은 나를 깨우지 않았다. 생각을 해주는 건지, 방목하는 건지 헷갈린다. 내 수학 성적 어떡하지? 물론 깨 있었다고 공부하지는 않았겠지만. 멍한 얼굴로 하품을 쩍 하는데 누가 보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새리가 나를 보고 있다. 하품을 너무 추하게 했나? 머쓱해져 한새리에게 씩 웃어보이자 한새리도 마주 웃어준다. 역시, 쟤는 천사야. 웃는 얼굴도 엄청 예쁘네. 한새리의 웃는 얼굴에 환각 성분이라도 있는지 몽롱하다. 마저 남은 잠기운인가...
“나은.”
“응?”
“나 한새리야.”
“응, 알아.”
“뭐를?”
“엉?”
“뭘 아는데?”
“너를 안다고.”
대뜸 다가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한새리가 의아하다. 일단 쟤가 내 이름을 안다는 게 신기하고... 근데 왜 이 생각에 기시감이 들지? 마치 전에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또 잡념에 빠져들던 찰나, 한새리가 또 해맑게 웃으며 내 앞자리에 앉아 뒤로 돈다. 얘 왜 이래?
“뭐, 할 말 있어?”
“음... 나은이는 요정 믿어?”
“갑자기?”
“응, 요정. 작고 날아다니고... 예쁜 것.”
“너?”
“기억 안 나나 보네.”
한새리는 내 농담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머쓱함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면서 생각했다. 저 웃는 얼굴이 무섭다고. 말을 섞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인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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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새리는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새리는 ‘집’이라는 공간을 둥지라고 부르긴 했지만. 둥지에 도착한 새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내려놓은 뒤 침대에 푹 쓰러져 누웠다. 꼭 있어야 할 것만 있는 자그마한 원룸이다. 책상 근처에서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리자 새리는 누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한 얼굴이다. 새리의 시선이 닿은 곳은 책상 위. 책상 위에는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듯한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엔티크한 새장이 놓여 있었다. 새리는 새장 속 생명체를 빤히 보다 싱긋 웃었다. 모두가 새리를 우러러보게 만드는 그 미소였다.
“이번 나은은 어떨까?”
새리의 달콤한 목소리에 새장 속에서 철창을 흔들며 울부짖던 요정의 울음이 멎는다. 일순간 모든 표정이 사라진 듯한 얼굴. 마치 흰 도화지 같은 얼굴이다. 비로소 요정의 이목구비가 보인다. 나은의 얼굴과 같다. 그것도 잠시, 요정은 전보다 더 격렬하게 철창을 쥐고 흔들며 꺾인 날개를 펄럭인다.
“나은, 포기해. 저번 나은이가 네 날개를 꺾었잖아.”
나긋하게 말을 마친 새리가 천장을 보며 누워 있다 별안간 침대 위를 뒹굴며 마구 웃어대기 시작한다.
“아, 너무 웃겨! 너랑 약속한 게 몇 년이지? 10년? 네가 너라는 걸 알아챌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새리와 눈이 마주치자 요정의 얼굴은 전보다도 더 일그러진다. 저주의 조건이다. 나은이 요정이 된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면, 얼굴은 더욱 더 일그러진다. 정답으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진다. 요정은, 아니 나은은 울부짖는다.
다음 레터는 새로운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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