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은 2014년 돈바스 전쟁 이래로, 우크라이나군 수뇌부를 고민하게 만든 질문이었음. 작은 소련군의 방식(우크라이나군)으로 큰 소련군을(러시아군)을 이길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앞으로 이어질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
물론 작은 소련군의 방식으로 여러 차례 돈바스 반군, 심지어 러시아군 BTG들을 상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앞으로 이어질 전쟁에서 이것이 과연 유효한가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기도 했음. 러시아군은 2015년 이후로 돈바스에 배치된 BTG의 숫자를 늘려서 우크라이나군의 기동을 막아섰고, 이는 곧 전면전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야함을 의미했음.
그리고 2022년 2월 24일, 결국 전쟁이 발발했고 세계의 놀라움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결사항전으로 7개 축선에서 이어진 공격을 대부분 격퇴했음. 헤르손과 마리우폴이 함락당하기는 했지만 수도인 키이우와 동북부의 하르키우, 그리고 오데사 등을 사수하면서 암울한 전황을 바꿔나아갔음.
이는 단순한 정신력과 높은 사기로만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었음. 앞서 언급한 "과연 작은 소련은 큰 소련을 이길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에 우크라이나군이 8년 동안 자국군을 개편하면서 답변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임.
러시아군은 2014년 돈바스 전쟁 이래로 BTG 체제를 고수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자국군을 NATO와 미국식으로 개편하면서 해답을 찾아냈음. 러시아가 현재 BTG 체제를 포기하고 기존의 사단/연대 중심의 부대로 돌아간 것을 생각한다면 꽤 괜찮은 해답을 내놨다고 볼 수 있음.
현재 러시아군이 지금 바흐무트 전선에서 시도하는 것은 전형적인 소련군식 축차투입임. 러시아는 지난 9월 동부전선 패배와 헤르손 철수 이후, 소련식으로 자국군 사단과 연대들을 개편해서 제파 공격을 할 것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음. 사실상 BTG 편성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고, 연대 중심으로 작전을 구사하고 있는 상황임.
사실 이는 나름대로 타당한 지점이 있는데, 소위 BTG라고 불리는 개념에 대하여 우크라이나군이 대응책을 오래 전부터 세운데다가 돌파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거 소련군식 제파 전술을 구사하려는 것임.
소련군은 넓은 전선 전체에 걸쳐서 파상공세를 퍼붓고, 취약해진 지점에 돌파 제대를 투입하며, 이를 통해 돌파당한 지점에 종심작전 제대를 투입하는 작전을 구사했었음. 그러나 러시아에게는 소련과 같은 작전기동군 편성이 사실상 존재하지가 않음. 제1근위전차군이 재건되었으나 전차와 장갑차 공급이 부족하며, 다른 사단 및 연대들 역시 병력만 어느정도 정원을 채운 수준일 뿐 돌파에 필요한 기갑 전력이 부족함.
즉 넓은 전선 전체에 걸쳐 투입할 보병은 많지만, 이제는 돌파에 필요한 기갑이 부족한 상황이 되었음. 작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것임. BTG 편성 중심일 때는 기갑을 받쳐줄 보병이 부족했다면, 현재에는 보병을 지원해줄 기갑이 모자란 상황임.
돌파력이 낮은 보병대 중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축차소모 뿐임. 바흐무트에서도 보았듯이, 보병 중심의 축차소모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우크라이나군을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고 있음.
바흐무트 공세가 시작된지 이제 어느덧 100일이 다 되어 가는데, 그 사이에 러시아가 거둔 승리는 솔레다르의 함락과 바흐무트 동부와 남부 일대에서 얻은 전술적인 이득 뿐이며 여전히 T-0504 도로와 M03 고속도로는 우크라이나군 통제 하에 놓여있음.
이러한 제파전술에 맞선 우크라이나군의 선택은, 자국군의 기초였던 구 소련식 군사전략 및 전술이 아닌 NATO식 전술의 도입이었음. 우크라이나군은 기존의 소련식 전술로는 국지적인 승리는 가능하더라도 총체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했음.
이유는 간단했음. '작은 소련이, 큰 소련을 과연 이길 수 있는가?' 이 부분에서 우크라이나군은 과거부터 바르샤바 조약기구와의 대결을 상정해왔고, 냉전 이후로도 러시아와의 대결을 구상했던 NATO의 전술과 편성 특히 참모조직들을 대거 이식해왔음. 물론 내부적으로도 많은 논쟁과 다툼이 있어왔음. 작은 소련식이냐, 새로운 NATO식이냐를 두고서 말임. 당연하게도 이는 우크라이나군의 전반적인 재조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음.
러시아군이 최근 시도한 제파전술에 맞서서 우크라이나군은 여단 중심의 군대로서 공지전을 구사하며 대규모 화력전과 미국식 BCT 전술, 네트워크전에서 러시아군을 압도하였음. 우크라이나군은 공지전에서 공군력을 사실상 뺐는데도 이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은 NATO식 전술이 그들에게 매우 유효했다는 의미임.
그 결과 우크라이나군은 바흐무트 전선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었을지언정, 러시아군의 스팀롤러 같던 제파공세를 어느정도 잠재울 수 있었음. 러시아군은 '큰 소련'을 선택하여 전장에서 이전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작은 소련' 이 되기보다는 NATO식 편제와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을 격퇴하고 있음.
물론 NATO의 편제와 교리가 쉬운 것은 아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의 제파전술을 박살내기 위해, 근 30년 가까이 연구하고 개량한 산실이었으며 러시아는 구 소련식 제파전술의 털끝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임.
결국 이 전쟁에서 진정한 승자는 개전 초기 혹자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와 미국이 아닌, NATO식 편성과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우크라이나와 그들을 지원해준 미국과 NATO일 것임. 그들은 러시아처럼 '큰 소련'을 답습하여 '작은 소련'이 되기보다는 '새로운 NATO식 군대'를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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