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후]흔적을 담은 동물원

'추후'의 뉴스레터

2021.06.02 | 조회 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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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

우리는 서른살이 됐고,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흔적을 담은 동물원

- 켄 리우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

 종이 접기로 만든 동물들이 가득한 동물원을 상상해본다. 한쪽에선 종이호랑이가 으르렁대고, 구석에서 종이 원숭이가 재간을 부린다. 그 뒤에서 종이 하마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고, 그 위에서 종이 코알라가 유칼립투스 잎을 씹고 있다. 갖가지 동물들이 놀고 있는 종이 동물원의 모습이다. 켄 리우의 단편 소설집 ‘종이 동물원’은 이런 다양한 동물들처럼, 다양한 장르와 매력을 가진 14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책과 종이 동물원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고 좋았던 기억이 있어 괜찮은 SF 단편 소설집을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종이 동물원’의 정보를 우연히 접하게 됐다. 처음 이 소설집을 접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왔던 건 작가 ‘켄 리우’의 약력이었다. ‘SF, 판타지 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 세계 환상 문학상을 모두 휩쓴 최초의 작가가 됐다.’ 문구를 읽자, 과연 얼마나 잘 썼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렇게 책을 펼치게 됐다. 시간이 흐르고 책을 덮었을 때, 나에게 편견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SF 영화는 많이 챙겨보는 편이었지만 그동안 SF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있었다. 난해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을까, 흥미 위주의 이야기가 대다수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책을 덮었을 때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게 됐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은 SF 소설집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소설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소설이란 손쓸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이고 무분별한 현실보다 은유의 논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논리란 대개는 은유의 논리이므로.”

- P.7 머리말 中

 그의 이야기는 은유의 논리로 작동한다. 그런 은유의 논리를 작동시키는 것은 자유로운 상상인 듯싶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현실이라는 넓은 대야에 한 방울의 상상을 떨어뜨려 섞는 방식이다. 상상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끔 하는 은유적 요소 역할을 한다. 그의 이야기를 새롭게 느껴지게끔 하는 윤활유가 되기도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켄 리우는 장르적인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형식들을 다룬다. 한 편의 소설이 끝나고, 다음 소설을 읽어나갈 때마다 그 다양한 변화에 감탄했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처럼 종이 접기로 만든 움직이는 동물이라는 판타지 설정을 기반으로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소설을 보여주기도 하고,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처럼 일종의 사전처럼 느껴지는 소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레귤러’와 같은 단편은 한 편의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이 연상된다.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파’, ‘모노노와레’ 이 세 가지 소설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역시 빠지지 않는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몇 가지 핵심적인 테마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동북아 역사적 비극, 우주로 나아가는 개척 정신과 같은 굵직한 주제들을 흥미로운 상상의 기술이나 대체 역사와 같은 SF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풀어낸다. ‘천생연분’, ‘즐거운 사냥을 하길’과 같은 단편에서는 기술 발전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경계를 하는 시선도 놓치지 않는다.

 특히 한국에 사는 독자로서 동북아의 역사적 비극을 다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두 편을 읽을 때는 마음이 아려왔다. 강제 징용과 731부대, 그리고 위안부에 대해 언급될 때마다 책장을 잠시 덮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작가는 역사적 상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질문을 던진다. 그는 역사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에게 결여된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역사적 상처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들의 입을 빌려 모두에게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역사적 상처를 다루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끝에 가서 남는 건 말이야, 압축된 기억의 기록일 거야. 그리고 그건 별로 논리적이지 않을 거야. 수면 위로 호를 그리며 솟구치는 고래의 우아한 궤적, 깜빡거리는 캠프파이어 불빛과 신나는 춤, 싸구려 와인과 검게 탄 핫도그 같은 갖가지 음식의 냄새를 형성하는 화학 물질의 화학식, 신들의 음식을 처음으로 맛 본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걸 테니까. 그 반짝이는 보석들에 담긴 의미는 명료하지 않단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보석들은 살아 있는 거야.’

- p.328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中

 켄 리우는 이야기의 힘과 글의 힘을 믿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역사적 상처,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이야기를 통해 이를 극복해내자고 말한다. 이야기란 과거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새로운 삶의 형태를 깨닫게 하는 변화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봄이 오면 들꽃은 다시 피어난다는 것을 믿는 일이기도 하다. 모두가 저마다의 기록과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모두가 책을 만드는 것이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이런 흔적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보게 된다.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매거진 '추후' 이제 막 서른이 된 친구들이 모여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서른의 시선을 담은 글을 매주 [월/수/금]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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