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린 침략의 서»
수학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수학의 정석»을, 영어 공부하는 학생에게 «성문 기초영어»를 추천합니다. (너무 낡았다고요? 기초가 그렇죠!)
그러면 켈트 신화 입문하는 분께는 무엇을 추천해야 할까요?
저는 «에린 침략의 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린 침략의 서»는 에린(아일랜드)에 연달아 쳐들어온 여섯 민족의 이야기로 아일랜드의 역사에 장대한 서사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켈트 신화 문헌입니다.
쿠 훌린이 되었든 핀 막 쿨이 되었든, 누구의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전부 이 책에서 설명하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전개하지요.
그러나 이 책은 (삼국사기처럼) 역사서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좀 딱딱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재미없습니다.
학자에게는 환호성이 나올 일이지만, 오타쿠에게는 절망적인 일이죠.
오늘 보내 드리는 뉴스레터에서는 «에린 침략의 서»의 중요한 대목들을 뽑아서 간단하게! 쉽게! 빠르게! 약해 드리고 싶습니다.
국내 유일 번역자의 요약이니 믿고 보실 수 있습니다 ^^
1. 하느님 가라사대 “죽어라”

세상이 생긴지 2242년째 되는 어느 날, 아마도 대략 기원전 2957년쯤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다 죽여버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만 제외하고요.
노아에게는 잘 알려져 있듯 셈, 함,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비흐(Bioth)라는 다른 아들이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비흐는 죽게 두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대홍수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비흐가 아빠에게 사정해 보았지만 답은 냉혹했습니다.
“방주는 강도의 배도 아니요 도적의 소굴도 아니니, 신께서 친히 택하신 사람 말고는 그 누구도 들일 수 없다.”
절망한 비흐에게는 마찬가지로 좌절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핀탄(Fionntan)과 라이라(Ladhra)라는 이름이었죠. 이 세 사람이 모여서 생각하다가 마침 비흐의 영특한 딸, 캬사르(Ceassair)에게 생각이 닿았습니다. “캬사르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절박한 아빠와 두 친구에게 캬사르가 내놓은 답은 이러하였습니다.
“내게 복종을 맹세하십시오. 우상을 새로 지어 그것에 신앙을 맹세하고 노아의 신을 버리십시오.”
그렇게 아빠를 자신의 종으로 만든 딸은 매정한 하느님을 버리고 토템을 만들어 그것을 신으로 선포합니다.
그러자 신통력 깃든 토템 가라사대, “배를 만들어 서쪽 끝으로 가거라 그러면 살 길이 있을지도 모르니라” 하였습니다.
세상 서쪽 끝으로 가는 쪽배가 모집한 일행은 남자 3명과 여자 50명이었습니다. 남자 셋은 비흐와 핀탄, 라이라였고, 여자 50명의 수장은 캬사르였습니다. 대략 석 달을 노를 저어서 마침내 다다른 섬은 바로 에린, 즉 아일랜드였습니다.
이제 새 땅에 도착했으니 정착을 해야죠! 남자 셋은 여자들을 "분배"합니다. 핀탄이 캬사르를 포함한 17명을 아내로 삼고, 비흐도 17명과 결혼했지요. 50 나누기 3이 16.666... 인 관계로 라이라는 16명만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시작됩니다. 라이라가 “너무 많은 여자 때문에” 죽은 겁니다. 끔찍하게도 그는 항문에 (배 젓는) 노가 꽂힌 채로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라이라의 열여섯 아내들이 수장 캬사르를 찾아가 어떻게 할지 묻자, 캬사르가 열여섯을 반반으로 갈라 각각 핀탄과 비흐에게 새로 시집을 보냅니다.
이때 우연히도 비흐가 급사해 버렸고, 스물다섯 여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핀탄은...
런해 버립니다.
라이라처럼 되지 않으려면 현명한 판단이었겠죠.
아빠는 죽고 남편은 도망치고... 속이 터진 캬사르는 그만 심장이 터져 죽고 맙니다.
머지않아 하늘에서 엄청난 비가 퍼붓습니다. 토템의 영성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일랜드 섬도 대홍수를 피하지 못합니다. 살아남은 마흔아홉 여자는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핀탄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핀탄은 마법에 능했기에 연어로 변신하여 목숨을 건졌답니다. 그 이후로 핀탄은 오래오래 섬에 은거하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갔습니다.
2. 아빠 죽이고 도망 왔어요

세계 각지의 신화에는 패륜과 부정이 흘러넘칩니다. 옛날 사람들도 그런 소재가 재밌었나 봅니다. 대홍수로 모든 것이 리셋된 뒤 아일랜드의 새로운 역사는 패륜으로 시작됩니다.
샤라(Seara)의 아들 파르홀론(Partholón)은 시칠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대 시칠리아에는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시라쿠사와 같은 대도시가 그 흔적입니다.
대홍수로부터 278년이 흐른 어느 날 파르홀론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형제가 왕위 상속을 받게끔 공작하려다가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파르홀론은 처벌을 피해 배를 타고 서쪽으로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그러다가 망망대해에서 아일랜드를 발견하고 눌러앉았지요. 파르홀론이 데려온 이들이 아일랜드에 최초의 집, 최초의 여관, 최초의 가마솥, 최초의 술, 최초의 버터, 최초의 농업, 최초의 상업, 최초의 방앗간 등등... 여러 최초의 것들을 도입합니다.
파르홀론의 아내 댤러그나드(Dealgnad)가 시종과 바람을 피우는 사건도 있었지만, 풍족한 섬에서 모든 일이 대체로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이 풍요로운 섬을 탐낸 이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이후로 수천 년 동안 인간들과 투닥거리며 섬의 주도권과 자웅을 겨룰 원수들, 포보리(Fomhóraigh) 일족입니다.
온라인게임 «마비노기» 덕분에 포워르라고도 알려져 있죠.
사실 파르홀론이 오기 200년 전부터 포보리 일족은 이미 아일랜드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들의 군주는 키홀 그린호사흐(Cichol gCríonchosach), 즉 "시든 발의 키홀"이었지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터가 안 좋아서인지 먹을 게 물고기와 새고기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파르홀론의 일족은 온갖 맛있는 걸 먹으면서 사는데 말이죠!
결국 200년 동안 물고기만 먹다 지친 포보리 일족은 800명의 전사를 동원해 파르홀론의 일족을 공격합니다. 이흐(Ioth) 벌판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일주일에 걸친 싸움 끝에 포보리의 군주 키홀과 그의 어머니 로흐(Loth)가 전사하고 파르홀론은 승리를 거둡니다. 이렇게 포보리와의 장대한 악연의 서장은 승리로 장식되었습니다.
“한 발과 한 손, 한 눈이 달린 포보리 전사들은 파르홀론의 일족과 일주일 동안 싸운 끝에 패하여 쓰러졌으며, 이것이 바로 에린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이다.”
3.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세요

승승장구한 파르홀론의 일족은 이제 섬을 갈아엎습니다.
아일랜드가 푸르른 초목의 섬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의외의 사실! 지금 아일랜드에는 숲이 없습니다.
고립된 지형과 인간의 벌목으로 천 년 전에 이미 목재가 거의 고갈되었죠.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원래는 아일랜드 전체가 울창한 숲 투성이었다고 합니다. 파르홀론의 일족은 여러 숲을 갈아서 들판으로 만들고 그곳에 농사를 짓습니다. 전형적인 인류의 정착상입니다.
또 하나 특이한 일이 있었는데, 사방에서 땅이 무너지고 호수가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의 불안정한 석회암 지질은 물에 녹아서 무너지고는 하는데, 그 자리에 지하수가 차면 작은 호수가 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많은 호수가 이렇게 형성되었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툭하면 땅이 무너지고 물이 들어차는 바람에 파르홀론의 아들들마저도 그 물에 빠져 죽는 사태가 벌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대도시 벨파스트의 동쪽에 로흐 쿠안(Loch Cuan)이라는 큰 호수가 있는데, 이곳도 이때 생겨난 것이라고 하네요.
몇몇 사람에게는 비극이 닥쳤지만 대체로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300년 동안 일족은 에린에서 번성하며 수십 명이 9천 명으로 불어났지요.
어느 날 사람들이 더블린 앞의 빈 에다르(Binn Éadair)에 모였는데...
그날 9천 명의 일족은 전멸했습니다.

“어느 오월 초하룻날 월요일, 파르솔론의 일족에게 조용한 바람과 같이 역병이 내려앉았다.”
네, 사인은 전염병이었습니다. 정말로, 뜬금없이, 하루 아침에, 빈 에다르에 역병이 돌아 남자 5천 명과 여자 4천 명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파르홀론이 일군 그의 후예들은 영원히 역사의 뒷장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실 딱 한 명만 빼고요.
사신의 낫을 교묘히 피하는 유일한 생존자, 카릴의 아들 투안(Tuan)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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