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409] 처음이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매일 주어진 질문에 하나씩 답하는 Q&A 북을 근 두달간 하고 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질문이 오늘 글의 제목이다. ‘처음이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누군가에게 처음은 설레고 재미있고 궁금증을 이끌어 내는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3월 6일의 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무섭고 두렵지만 사소한 처음들을 자주 마주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요즘 나의 목표이다. 그만큼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벽이고, 어렵지만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은 것이다.’

현재 재학 중인 학교에서 진행하는 상담에 참여하기 위해 기질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검사 결과에 대한 항목들은 다음과 같았다. 자극 추구, 위험 회피 그리고 인내력. 놀랍게도 나는 자극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질은 100 중 0,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은 100 중 92, 인내력은 100 중 76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나는 그만큼 자극이나 새로운 것을 싫어하고,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회피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갖고 있는 나는 스카이 다이빙, 번지점프 이런 것들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일상 속의 변화에도 수많은 생각과 다짐을 해야 하고, 망설임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기질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새로운 식당 조차도 혼자 가지 못한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는지, 직접 직원분께 주문을 해야 하는지, 선결제인지 아닌지 이 모든 선택지의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사소하지만 발길을 돌리게 하는 두려움으로 작용하고는 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나는 이런 나의 기질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새로움을 의식적으로 마주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결심은 영국으로 오는 것이었다. 대개 그렇듯 유학을 결정하게 된 목적 중 하나는 영어 실력의 향상이었지만, 이 시기에 나에게 필요한 태도를 배우기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어딜 가든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던 한국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철저히 이방인이 되어버리는 것.

이곳에서의 나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도전이고 다짐일 수 밖에 없다. 원어민들과 전문가들이 가득한 세미나를 들으러 한 번 가보기도 하고, 혼자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고, 스몰토크를 시도해보기도 한다. 세미나에 가서는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입을 열지도 못했다. 그러나 결국 도망치지 않고 직면해내는 나의 자세를 학습하는 것이 요즘 나의 목표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의미가 충분했다. 결국 시도해보면 별 일이 아니라는 당연하고도 누군가에게는 습득할 필요조차 없을 감각을 요즘의 나는 학습하고 있다. 항상 내가 되뇌이는 말, ‘재채기 하듯 하자’. 길게 생각하지 말고 재채기 하듯, 미끄러지듯 무언가를 한 번 해보고 나면 어느 새 더 넓어진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욕망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모든 출생의 행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버리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날 용기, 엄마의 손을 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중략..)

새로 태어나겠다는 마음가짐은 용기와 믿음을 요구한다. 안전을 버릴 용기, 타인과 다를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딜 용기다. 조국과 가족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걸어가는 용기다.

엄마의 품과 같던 익숙하고 편안한 한국을 떠나 미지의 땅인 영국으로 걸어온 나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들에 의연하게 대처할 줄 알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기억해야 한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놓아버리거나,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안정감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내가 서 있는 그만큼이 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상담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기질은 성격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타고난 기질은 후천적인 성격으로 인해 보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셨다. 나의 기질로 인해 매일 사소한 일들이 나에게는 과제이고, 도전이지만 그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내 손으로 만들어 가는 세계가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나의 속도로 세계를 찬찬히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