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Race and Diversity 수업과 이름, 그리고 정체성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메일이 자꾸 늦어져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미국 대학이 "빡센건지", 연수 말대로 내가 미국 대학을 한국식으로 "빡세게" 다니는 건지, 요즘 수업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도 꼭 일주일에 한 번은 글과 사진을 보내드리려 한다. 내가 이것도 안 지키면 언제든 항의 메일을 쓰셔도 달게 받겠다. (항의 메일은 maidez2018@지메일....)
수업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은 지난번에 소개한 Photography 말고 다른 수업 얘기를 해볼까 한다. 일주일 간 있는 수업 중 사진 수업 다음으로 기대되는 수업, 어린이 청소년 도서를 가지고 인종과 다양성을 공부하는 “Race and Diversity in Children and Young Adult Books: Reading Between the Lines” 다. 이주에 한 권씩 각각 다양한 인종의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청소년 소설을 읽고 학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 위주 수업인데, 교수님께서 깊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질문을 많이 던지셔서 매주 기대된다. 특히 수업 주제가 주제다 보니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이 많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인종이나 국적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요?" 등등.
그중에서도 며칠간 내 머릿속에 남았던 질문은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나요? “다.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학우도 있었고, 부모님께서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의 이름을 따라 지어주셔서 러시아인이 아닌데도 러시아 이름을 가진 학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가. 아이패드 메모장에 James, Emily, Jessica를 치면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지만 Minha 밑에는 빨간 줄이 그어지는 미국에서 내 한국적 이름의 기원을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내 이름 민하는 조부모님께서 작명가에게 받아오셨다고 알고 있다. 한자로 민은 옥돌 민, 하는 아래 하. 옥 아래 있는 사람?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민은 내 동생들과 돌림자고, 아래 하는 성명학적으로 마지막 글자의 획수가 3획이 되면 좋다고 해서 받아온 한자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한국에선 특별할 것 없는 기원이지만, 이 얘기를 미국 교실에서 설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한글과 한자의 관계부터 얘기해야 하고 (그것도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오해를 주지 않으면서), 이름은 운명을 결정한다는 믿음과 성명학을 설명해야 하며, 한국 이름은 보통 3음절이라는 것 하며 형제자매와는 돌림자를 쓰는 것까지... 갑자기 엄청난 연대기가 된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삼 음절 (또는 이 음절이나 사 음절) 이름을 쓰는 한국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하던 이름이 미국 출석부에서는 튀듯, 정체성도 주변 환경에 따라 특정 요소가 드러나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한국인인 한국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큰 의미가 없지만, 배경이 미국으로 바뀌는 순간 갑자기 한국인이 나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이는 내가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스스로 깨닫기도 하지만 (막상 미국에서 살아보니 한식 러버였다든가), 다른 이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타의로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은 여기에서 소수 정체성이다. 심지어 이 다름은 숨길 수도 없이 가시적으로 두드러진 표식이다.
이름은 그중에서도 제일 처음 드러나는 표식이다. 이름은 상대를 실제로 만나기도 전에 많은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내 이름을 보고 어떤 정보를 불러오고, 어떤 첫인상을 형성할까. 그건 내가 모르는 영역이다. 출석을 부를 때나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보면 괜히 긴장하는 이유다. 발음과 스펠링 때문도 있다. 밀-하, 민하, 밍하, 민해이... 룸메는 내 이름을 자꾸 Minah라고 쓴다. 소심쟁이는 한 번까지는 고쳐주지만 그다음은 그냥 넘어간다. 누군가를 지적하는 일은 민망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이름을 정하는 한국 교환학생이 많은 것 같다. 민하가 갑자기 제시카가 되는 급격한 정도의 개명까지는 못 봤고, 보통은 센스있게 한국 이름과 비슷한 미국식 이름을 짓더라. 진하가 Jen이 되고, 지혜가 Jay가 되는 것 같은. 다른 나라에서 온 교환 학생에게 한국 학생의 한국 이름을 언급하면 누군지 모르는 일도 있다. 그 친구가 나에겐 한국 이름으로 소개했지만 다른 나라 학생에게는 미국 이름으로 소개해서 생기는 해프닝이다.
Race and Diversity 수업 과제로 읽은 "The Name Jar"라는 동화책은 이 상황을 잘 담아내었다. 주인공 은혜는 미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된 한국 어린이이다. 미국 초등학교 반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해야 하는데, 통학 버스에서 이름 갖고 놀림받아 주눅이 들어 그만 이름이 아직 없다고 말해버린다. 유리병에 각자 추천하는 이름을 쪽지에 적어서 넣어주는 친절한 친구들. 하지만 결국 은혜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용기를 얻고, 반 친구들도 점차 발음을 정확히 하게 된다.
그렇다고 미국 이름을 택하는 한국 학생이 자존심도 없는 쫄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눈엔 그보다는 좀 더 가볍고 즐거운 마음의 정체성 실험으로 보인다. 오히려 미국에 왔으니 주변 환경에 따라 미국적 정체성을 탐험하고자 하는 도전적 마음까지도 엿보인다. 한편으로는 좀 더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미국 이름을 정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입사 지원할 때 백인처럼 들리는 이름을 가진 지원자가 더 유리하다고 하데. 학문 영역에서도 백인 남자처럼 들리는 이름이 더 주목을 많이 받는다고 하고. 나는 구직자도 학자도 아니지만, 갑자기 틴더에서 백인 이름을 쓰면 더 인기가 많아질까 살짝 흔들린다.
나는 그래도 내 이름을 그대로 쓴다. 민하는 미국에서도 민하다. 행여나 한국 이름을 한 번도 못 본 미국인을 만나면 내가 그에게 첫 한국 이름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어서. (아니다) 이건 그냥 그럴듯한 이유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존심이 세고 의미 부여를 많이 하는 성격이라 그렇다. 근데 자존심 센 쫄보라 이름 표기는 튀고 싶지 않아서 한국식 이름을 표기할 때 종종 쓰는 하이픈은 넣지 않았다. 이름에 하이픈이 들어가면 안 그래도 튀는 이름이 더 튈 것 같아서.
그래도 영어 이름을 정했으면 어땠을까, 영어 이름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나를 상상해본다. 정했다면 뭐로 정했을까. Martha, Hope, Clara, June. 아이돌 데뷔하려고 가명 정하는 것 같아서 잠시 설레는 기분이 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를 소개할 때마다 거짓말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 이내 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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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하니
재밌어보이는 수업이네! 혼자서만 고민하거나 친한 친구랑만 얘기 나누던 문제를 수업시간에 다양한 사람들이랑 같이 얘기한다는 게 좋아보여 나는 여성으로서, 이러저러한 성격과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만들어갈지) 고민해보는 중이야! 예전엔 이런 걸 고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누가 정해진 답을 주면 참 편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즐기면서 하는 중 ㅎㅎ 너가 수업 시간에 재밌는 거 많이 배워와서, 다녀오면 얘기 잔뜩 들으면 좋겠다 !!
미미나상의 교환일기
언니 !! 이렇게 길고 다정하게 댓글 남겨줘서 고마워.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정체성의 한 부분 아닐까 ㅎㅎㅎ 나도 다녀오면 맛있는 케이크 먹으면서 언니의 생각 듣고 싶다. 즐겁고 안전한 추석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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