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hotography 수업과 경찰, 그리고 환경미화원
미국은, 적어도 내가 다니는 Temple은, 한국보다 대학 개강일이 빠르다. 8월 말에 개강이라, 개강 직전 주에 온 나는 살림이 온전히 갖춰지기도 전에 정신없이 개강해서 벌써 수업도 듣고 여러 번의 과제도 제출했다.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은 총 네 개로, Immigration and American Dream, Race and Diversity, Technology and Culture, 그리고 Photography이다. 보통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두 번 정도의 레포트만 과제로 내주는 한국 대학 수업과는 달리 여기는 과제와 리딩 양이 굉장히 많다. 리딩을 다 읽었다는 전제하에 수업을 진행해서 매일 있는 리딩을 읽지 않으면 수업 시간에 멍만 때리다 오게 된다. 과제 역시 간단한 (그렇지만 재미없는) 레포트가 아니라 인터뷰, 팟캐스트, 동영상 등 다양한 과제를 내준다. 물론 어렵지만, 학문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계속 도전하고 성장하게끔 자극해서 2학년 이후 죽 있었던 짐 덩어리 같은 슬럼프가 한 번에 극복된 느낌이다.
요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수업은 Photography다. 교수님이 정말 미운 이 수업은 매주 7장의 미션 사진을 찍어서 과제로 제출하는데, 미국 노동절이 껴서 긴 이번 연휴에는 노동절을 테마로 다양한 사진을 찍어야 했다. 교수님이 요구한 사진은 불꽃놀이, 노동자, 길에서 만난 흥미로운 사람, 공무원이나 자원봉사자 등 하나같이 주옥같고 그냥 걷다가는 마주할 수 없는 장면들이다. 교수님 말씀대로 사진은 앉아있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비단 사진만 그러겠는가. 사진이나 글이나 영상이나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계속 돌아다니고 사람과 얘기해야 뭐가 나온다) 그렇게 노동절 휴일 3일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아이고 집순이 죽네.
맞다. 아직 5인 이상 집합 금지인 한국에서 보면 기함하겠지만 주말에만 콘서트 두 개를 다녀왔다. 아니면 불꽃놀이를 도대체 어디서 찍냐고. 토요일에는 마룬파이브의 콘서트였다. 행여나 불꽃을 터뜨릴까 작은 희망을 걸어봤지만 끝내 불꽃놀이는 없었고, 행사장 밖에 귀여운 핫도그 모자 쓴 핫도그 아저씨 사진을 찍었다. 교수님!!! 휴일이니까 불꽃놀이 아무 데나 다 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결국 다음날, 저스틴 비버와 도자캣, 메간 디 스탈리온 등 핫한 아티스트 수십 명이 온 Made in America에서 불꽃놀이를 찍을 수 있었다. 비버가 베이비를 부르는데도 똥줄 타면서 불꽃놀이 타이밍만 기다려야 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는 행사가 끝나고 나서부터야 본격적 근무가 시작되셨을 행사장 근로자분들도 찍었다.
원래 집순이는 이틀 연속 외출 안 한다. 근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한 가지를 못 찍었다. 공무원/자원봉사자 사진. 하는 수 없이 연휴 마지막 오늘도 밖에 나왔다. 길에서 경찰 한 분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학교 쪽으로 무작정 걷는데, 자전거를 타고 내 앞에 경찰 한 분이 나타난 게 아닌가. 익스큐즈미, 나쁜 교수님이 과제로 경찰 사진을 찍으랬는데 혹시 찍어도 될까요, 하니 물론이지 하고 포즈를 잡아준 웨인. 땡큐 하고 사진을 후다닥 찍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와 사진을 확대해보니, 음? 가슴팍에 "Allied Universal Security Services"라고 쓰여 있다. 불안한 마음으로 구글에 쳐보니 아뿔싸, 사설 보안업체다.
그제야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학교 앞에 상주하는 경찰차, 당연히 경찰이려니 생각했지만, 차를 자세히 보니 "Police of Temple University"라고 적혀있다. 학교 주변 대로변에 종종 보이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경찰"도 알고 보니 모두 사설 경비원이었다. 이 동네에는 그래도 경찰이 자주 다녀서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지금껏 미국 와서 한 번도 경찰을 본 적 없었다. "학교 근처에만 있으면 안전해요." 교환학생 후기 보고서에서 몇 번이나 본 말이었다. 과연 학교 근처는 안전하고, 깨끗했다. 학교에선 경비업체와 청소업체를 고용하기 때문이다.
캠퍼스는 쾌적하고 낭만이 가득하다. 잔디밭은 항상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점심에는 저마다 나무 밑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낮잠을 잔다. 야외에 앉을 곳도 많아서 학교에 강아지를 데리고 같이 산책하는 학우도 많다. 강아지를 키우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말했더니 살기 좋아 보인다고 했다. 학교 안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길 하나만 건너면 길바닥에 다 쓴 기저귀가 굴러다닌다. 깨진 유리가 여기저기 있어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기에 위험하고, 쓰레기를 안 치우는지 인도에 쓰레기 봉지가 넘쳐서 도로로 걸어 다녀야 할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밖에서는 환경미화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대신 아무도 안 치워서 죽은 지 한참 된 동물의 사체를 벌써 네 번이나 보았다. 쥐, 다람쥐, 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한 마리.
학교에서 영어 대화 연습 파트너랑 이야기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여기는 왜 이렇게 길거리가 더러워? 그랬더니 미국은 공동체를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공동체주의적 사고가 부족해서 그럴 수 있겠다고 했다. 한국은 뭐 그럼 거주지를 깨끗하게 관리하자는 시민으로만 이뤄졌나? 공동체주의 사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극한의 개인주의이리라. 안전과 청결 같은 아주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개인주의적 사고. 필라델피아가 좀 극단적인 편일 수도 있겠다. 찾아보니 필라델피아에는 시 운영 환경미화 시스템이 2000년대 이후로 사라졌고, 이는 대도시 중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사라진 이유는 재정 부족과 잦은 민원. 환경 미화를 할 때 도로에 주차된 자동차를 옮기는 과정에서 민원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환경 미화를 없앨 수 있나?)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올해 8월부터 필라델피아에서 다시 환경 미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지역별로 구역을 나눠서 쓰레기차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돌아왔다니 다행이다. 여전히 우리 기숙사 앞은 쓰레기로 넘치긴 하지만.
깨끗하고 안전한 주거지는 재산에 따라서 차등이 있어서는 안 되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생존의 문제가 아닌가. 가는 곳마다 도로가 청결한 정도가 이렇게나 널뛰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문득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친다. 대화 연습 파트너가 나에게 한국은 빈부격차 문제가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그래도 공공 기반이 미국보다는 나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얼른 나는 이 얘기를 하기엔 너무 아는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필라델피아와 비교해서 한국이 살기 좋다고 죽 생각했지만, 한국에선 진공처럼 안전하고 쾌적한 동네에서 살아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도 적어도 한국에 돌아가면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찰인 줄만 알았던 사람이 자세히 보니 사설 보안업체 직원임을 깨달았던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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