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한국에 두고 온 것
8월 17일 오후 다섯 시 인천에서 8월 17일 오후 여덟 시 필라델피아로 시공간을 날아가는 비행기 안, 한국에 두고 온 것들을 생각합니다. 냉장고에 전날 사 놓은 천하장사 소시지 2개, 냉동실에는 체리마루 하나. 아빠 차에는 비행기에서 읽으려 샀지만 무거워서 떠나기 직전에 뺀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지니>. 제 방에는 끝내 60여 페이지를 못다 읽은 <언캐니밸리>. 떠난 후에 찜찜한 미련이 남지 않게끔 며칠 전부터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기어코 무언가는 남았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부스러기 마냥.
떠나기 몇 주 전부터 소중한 이들에게 연락했습니다. 소개받은 지 두 달 된 교수님부터 사소한인터뷰 팀원들, 중고등학교 친구들, 고등학교 은사님, 대학교 은사님,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사촌 언니, 막내동생, 엄마, 아빠, 맹구까지. 살면서 안녕이라고, 잘 있으시라고, 다녀오겠다고 말할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흔치 않기에 운이 좋다고 느낀 나날들이었어요. 그렇다면 이다음에 올 감정은 후련함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이어야 할 텐데, 조용한 밤 비행기에서 저는 아직 아쉬움을, 그리고 벌써 그리움을 느낍니다. 저는 헐렁한 사람입니다. 야무지지 못해서 먹으려고 사놓은 것도 까먹고요, 상대를 그리는 마음도 질질 끌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뒤에 남기고 다니고요.
문득 가방에 챙긴 짐을 떠올립니다. 수화물 제한 무게를 아슬아슬하게 넘기지 않을 정도로 싼 캐리어에는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와 3분카레 따위의 간편식을 빼면 모두 제가 아끼는, 그리고 저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엄마가 싸준 수저와 묵주, 아빠가 싸 준 코펠과 가방. 생일도 아닌데 작별 선물이라고 친구들이 준 선물, 그리고 공항에서 맹구가 준 지갑과 편지까지. 맘만 같아서는 이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부린 욕심입니다. 미국행 비행기에 타서야 한국에 내가 아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습니다. 오직 그 사실만이 한국이라는 곳을 나에게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도요. (그리고 단지 그 사실만으로 전 아마 한국을 떠나 살지 못할 거예요.)
가방에 꽉꽉 채워 온 마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는 내내 흘리고 온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만. 6개월 뒤에는 이곳에도 한국까지 질질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미국에 두고 온 것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겠죠. 그럴 수 있도록 필라델피아에서 유심히 보고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시간을 보내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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