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이 판결을 가지고 정부와 거래를 하다니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사법농단’, 잊지 않고 계신가요? 상고법원을 신설해 대법원의 위상을 더 높이고 싶었던 대법원의 핵심인물들이 박근혜 정부 입맛에 맞는 판결이 나오도록 재판에 개입했던 사건이었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주요 피고인들이 온갖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끄집어내며 심리를 지연시킨 결과, 첫 판결까지 5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는데요, 지난달 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피고인 3명이 1심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법농단 사건 구조의 정점에 서있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무죄 판결을 받자, 법원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비판이 쏟아져 나왔어요.
재판개입은 맞지만, 형사처벌은 못한다?
일각에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법농단은 없었다’는 프레이밍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사법농단의 핵심인물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재판개입의 실체가 드러나고 인정됐습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심 판결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된 재판개입행위만 해도 10건에 이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판결문에도 “명백한 재판개입”이라는 표현이 곳곳에 등장해요.
그런데 왜 무죄판결이 나왔냐고요? ‘재판개입은 있었으나,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게 1심 재판부의 논리입니다. 없는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무죄라는 거죠. 이에 대해 사법농단 내부고발자였던 이탄희 의원은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유죄인데, 더 나쁜 짓을 했어도 권한이 없었다면 무죄라는 비상식적인 논리’라고 지적했어요. ‘사람 몸에 칼을 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의사가 수술하다 환자가 죽으면 업무상 과실치사로 유죄인데, 칼 댈 권한 없는 사람이 칼로 누군가를 찔렀다고 무죄가 되겠느냐’며 비유했죠.
‘대법원장의 막강한 인사권’과 괴리된 판결
이번 판결은 대법원장이 제왕적 권력을 누리며 인사권을 행사하는 현실과 괴리된 판결이라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재판 개입 행위는 있었지만, 판사들이 했던 판결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결론을 냈기 때문인데요, 일선 판사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대법원 산하의 법원행정처가 ‘물의 야기 법관 보고서’를 작성하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직접 체크(V)표시로 인사 불이익 조처를 결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잖아요. ‘판사 블랙리스트’로 불린 물의 야기 법관 보고서에는, 법원 내부 게시판에 사법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거나, 한겨레 신문사와 인터뷰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죠. 판사들이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의 눈 밖에 나면 인사상 불이익을 당해왔는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재판개입에 영향을 받지 않고 판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판사들이 코스튬 입고 양비어천가 노래… 낯뜨거운 충성경쟁 배경은
우리나라는 법원인사권이 사실상 대법원장에게 집중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전국 모든 판사들의 대규모 전보인사와 각종 승진·선발성 인사의 권한이 전적으로 대법원장에게 있다고 해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전국 법원 한마음 체육대회’를 만들자 그곳에서 대법원장을 향해 판사들의 충성경쟁이 벌어졌다고 하죠. 양승태 대법원장을 찬양하는 카드섹션 이벤트를 하고, 노래를 개사해 ‘양비어천가’를 부르고 판사들이 웨이터, 세일러문 코스튬을 입기도 했대요.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얼마나 막강하길래 판사들이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사법개혁 과제, 퇴행하고 있다
법관들이 윗선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관료화된 법원의 현실이 세상에 드러나자 사법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가 폐지되었고,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 제시권을 없애고 법원장 후보 추천제와 사법행정자문회의가 도입되었어요. 대법원장을 견제하기 위한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상설화도 추진됐죠. 무엇보다 법원 내의 관료화를 심화시켰던 조직인 법원행정처의 기능을 축소했어요. 일선 판사들에게 법원행정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행정처 상근 판사들의 숫자를 대폭 줄였어요.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에 상근하는 판사의 수가 40명에 달했지만 2023년에는 10명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사법농단 핵심 뇌관’ 법원행정처 다시 키우는 조희대 대법원
그러나 이러한 사법개혁 움직임들이 후퇴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나와요. 조희대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힘을 다시 키우고 있는 게 대표적인 퇴행이에요. 2023년 말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시행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어요. 각급 법원 판사들의 추천 의견 없이, 대법원장이 법원장을 낙점하겠다는 거였죠. 얼마전 발표된 정기인사에서는 법원행정처 상근 법관을 17명으로 늘렸습니다. 70% 증원이에요. 사회적·정치적으로 중요한 판결에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 그것이 행정처 상근 판사들을 통해 재판부에 전달되는 통로가 다시 구축되고 있다는 지적이 법원 안팎에서 나오고 있어요.
더욱 은밀하게 일어날 ‘사법농단 시즌2’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거라고 믿었던 판사들이 사실은 관료화되어있었고, 결국엔 조직의 입맛에 맞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문제가 사법농단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후 사법농단의 재발을 막기위한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어요. 사법농단의 정점에 있는 인물들마저 무죄판결을 받게 되니 ‘사법농단 시즌2’가 심각하게 걱정됩니다. 법조계에서는 사법농단 주동자들을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없다면 ‘지위남용’에 대한 처벌을 입법으로 명시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권한에 없는 부당한 지시를 처벌할 수 있도록하여 방지하자는 거죠. 이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내버려둔다면 제2의, 제3의 사법농단은 더욱 은밀하게 일어날 것이고 가장 큰 피해자는 일반 국민들이 될 것입니다.
👇구독자 설문조사 참여 링크 (완료 시 기프티콘 100%지급)
※ 2/25(일) 23:59 마감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