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실손보험 하나씩 갖고 계신가요? 갑자기 다치거나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의료비가 많이 나왔을 때, 실손보험이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보험사에 청구하면 의료비의 상당액을 돌려받을 수 있잖아요. 요새는 스마트폰으로 영수증 등의 서류를 찍어서 보험사 앱에 등록하기만 하면 빠르게 보험금이 입금돼요. 우리에게 익숙한 네이버나 카카오톡을 이용할 수도 있고, 보험설계사를 통해서 청구할 수도 있죠. 예전보다는 보험금을 청구하는 방식이 다양해지고 편리해졌지만 여전히 이런 과정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실손보험 가입자가 좀 더 손쉽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지난달 법 개정이 이뤄졌습니다. 일명 '실손보험 청구간소화법'이라 불리는 법이 통과된 건데요, 이 법은 민간 보험사들이 14년 동안 추진해온 숙원사업이었어요. 보험회사들은 보험금 청구 절차가 복잡해 의료비가 많이 나오지 않은 경우에는 가입자들이 청구를 하지 않는다면서, 이 법이 통과돼야 소액 보험금 지급이 활성화된다고 주장해왔어요.
‘보험금 더 많이 타가게 만들어달라’ 믿기지 않는 보험사들의 요구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실손보험으로 인한 손해율이 막대하다며 보험료를 계속 올리는 보험사들이 오히려 보험금 청구를 더 많이 하게끔 만드는 법을 숙원사업으로 밀었다니요. 보험 약관과 다르게 보험료를 적게 받거나 지급거절을 당해왔던 중증질환 환자들은 '보험사는 최대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적게 지급하려고 하지, 보험금을 더 쉽게 타가라고 법을 만들 리 없다'고 지적합니다.
‘보험회사의 진료기록 갈취법’이라 불리는 이유
‘소비자의 편의 증진’을 내세운 실손보험 청구간소화법이 사실은 보험사들의 배만 불리고 보험가입자들의 편익은 줄이는 법이라는 우려가 꾸준히 나오고 있어요. 이 법이 걱정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송대행기관’을 두고 있기 때문이에요. 병원에서 환자가 받은 치료와 관련된 서류를 전송대행기관에 보내면, 이 기관이 각 보험사들에게 전송해주는 구조가 문제라는 겁니다.
전송대행기관 후보로 보험개발원이 유력한 상황인데요, 보험개발원은 보험회사들이 출자해 설립한 기관으로, 보험회사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에요. 삼성화재·교보생명·하나손해보험 등 보험사의 사장들이 보험개발원 임원으로 있고, 역대 보험개발원장들 다수는 퇴직 후 보험사 부사장 등의 자리에 앉았죠. 이러한 보험사들의 연합체가 보험청구 서류를 중계하는 기관이 되면 보험사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의료정보를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미 보험개발원은 고객의 정보를 남용한 전적이 있어요. 2017년 자체 보유한 1억 5천만 건의 개인정보를 현대자동차 고객정보와 두차례 결합했던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는데, 당시 개인정보 관련 법률들을 위반한 행위였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보험개발원과 같은 전송대행기관을 두지 않고도 청구 간소화를 이룰 수 있다고 지적해요. 의료기관에서 직접 보험사에 전송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있고, 현재 각종 핀테크 기업들이 관련 기술을 마련해 놓은 상황인데 굳이 중계기관을 둘 필요가 있냐는 거죠. 가입자들의 의료정보가 중계기관에 모이면 의료정보가 축적될 위험성만 커질 뿐이에요.
중계기관에 쌓인 진료데이터, 보험금 삭감에 쓰일 가능성 높다
보험개발원에 의료정보가 축적되면 보험사들은 이를 어디에 활용할 수 있을까요? 빅데이터를 소유해 개개인의 위험을 평가해서 고위험군 가입을 배제시키거나 보험료를 올릴 수 있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청구 간소화로 소액의 보험금을 쉽게 타갈 수 있게 만들면서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통해 중증질환 의료비 보상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실손보험을 가입하는 이유는 사실 나중에 큰 병에 걸리게 됐을 때 보장받기 위해서인데, 중증질환 보장이 점점 어려워진다면 보험사들만 이익을 보는 구조가 되겠죠.
‘의료민영화의 초석’ 다졌다는 평가 나와
14년 간 이어졌던 엄청난 반대를 뚫고 보험사들은 숙원사업이었던 법안 통과를 이뤄냈습니다. 환자단체를 포함한 전문가들은 이번 법 개정이 의료민영화의 신호탄이라고 경고하고 있어요. 청구간소화를 통해 의료정보를 축적하고 중계할 수 있는 주체가 된 보험사들의 다음 스텝은 보험사가 직접 병원에 의료비를 지불하는 모델을 만드는 게 될 거라고 예측됩니다. 의료가 민영화된 나라의 의료시스템과 비슷해지도록 한 계단, 한 계단이 마련되고 있다는 거죠. 실제로 보험사들의 미래 전략은 정부의 건강보험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 보험사의 내부전략보고서를 보면 보험사들의 야심을 알 수 있어요.
실손보험 가입자가 3천만명을 넘어섰습니다. 국민들 대부분이 실손보험에 가입했다고 봐도 무방하죠. 고령인구의 비중이 높아져 건강보험 보장율을 빠른 시간 내에 끌어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실손보험은 불가피하게 우리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실손보험은 기본적으로 민간보험사가 이윤을 추구하는 영리사업이기 때문에 그 해악을 줄이기 위한 규제가 필요합니다. 이대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을 내버려두면 우리 사회의 의료 공공성을 지킬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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