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망쳤지만 l 결국, 도달한 친구

Moist Notes

2024.06.18 | 조회 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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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한마케터

Moist Notes

집요한 마케터들의 기록. @moist_mlab https://blog.naver.com/moistmarketer/222726304393

야구 만화 '메이저'라고 아실까요. 물론 모르셔도 됩니다. 일본 만화고, '고로'라는 아이가 프로 야구선수(투수)가 되는 여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적으니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데요. 완전히 픽션입니다. 초등학생때 푹 빠졌던 만화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무튼, 야구를 사랑하는 소년 고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당연히 야구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런데 야구는 혼자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잖아요? 자연스레 주변 친구들을 '야구' 세상에 초대합니다. 야구에 별 관심이 없던, 닌텐도 게임기를 더 좋아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야구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묘사가 자주 등장하지요. 그렇게 야구에 진심인 소년들이 많아집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밤새 연습한다거나.

 

하지만 현실은 냉정합니다. 야구로 유명한 명문 고등학교 입학, 혹은 프로 데뷔 등. 이런 문턱 앞에서는 열정보다는 실력이 우선이지요. 다 떨어져 나갑니다. 다 탈락해요. 고로, 그리고 극소수의 '야구 천재' 소리를 듣는 고로의 친구 외에는 전부 소리 소문없이 사라집니다. 작품의 스토리라인에만 집중한다면, 사실 이들의 사라짐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눈 앞의 역경을, 고로가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만화니까요.

 

그러다, 고로가 국가대표가 됩니다. 그리고 TV에 나오는데요. 그간 사라진 고로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묘사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TV에 나오는 고로를 보고 추억에 잠기지요. '고모리'라는 친구는, 고로와 오랜 기간 합을 맞춘 포수입니다. 그는 현재 영업직으로, 양복을 빼 입고 부하 직원과 함께 전자 상가 안을 걷고 있었지요. 그러다 옛 친구의 모습을, 진열된 TV에서 보게 됩니다. 이런 묘사가 연속됩니다. 고모리 외에도, 다른 과거의 친구들이요.

 

이 장면을 보고, 어린 시절의 저는 충격받았던 기분이 듭니다. 감동적인 씬이어야만 하는데, 왜 저는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1. 그들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렇습니다. '와, 내가 얘를 잊고 있었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좋은' 이들로 취급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매정한 사람인가? 

 

2. 그들의 '현실적인' 모습에 당황했던 것 같아요. 이루지 못할 것은 없고, 노력으로 달성 가능하다는 것이 소년만화의 대표적인 메시지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놀랐어요. 제가 어려서 더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노력하면 된다'라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무조건적으로 믿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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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였어요. 요즘 전문직 분들이 퍼스널브랜딩 목적으로 많이 오십니다. 변호사분들의 문의가 은근 있어서, '잘 나가는 법무법인들은 어떤식으로 홈페이지를 구성하나' 싶어 들어가봤습니다. 대한민국 대형 로펌하면 떠오르는 몇몇 곳들이 있잖아요.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마주합니다. 고등학교 3년을 내리 같은 반에서 보낸 친구.

이력부터 화려합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로스쿨 졸업, 대형 로펌 입사. 맡고 있는 분야는 M&A, 사모펀드, 부동산. 이정도면 질투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하. (정확하진 않지만) 중간에 단 한번도 붕 뜨는 기간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왔을겁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 초반에 한두번 연락한 것 외에는 전혀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

그냥 냅다 카톡을 보내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이 가시질 않더라고요.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저 역시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메이저 만화가 떠오르더라고요. '고모리'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도 한때는 저렇게, '공부' 하나로 정점에 도달해보고 싶다는 꿈을 꿔 본적이 있어요. 쓰고 나니 진짜 중2병 수준을 넘어, 온몸이 오그라드는데요. 꾹 참고 써보겠습니다. 작은 성공을 경험하며 정점에 대한 욕심이 스물스물 피어오른 것 같아요. 성취감 기반의 사고.

잘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었을 때,

나만의 암기 공식을 만들어냈을 때,

이해가지 않던 증명 문제를 풀어냈을 때. 이 순간마다, 자신감이 넘쳤지요. 꿈은 커졌고요. 

 

그러다 고등학교 - 대학교를 진학하며 '진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만납니다. 대표적으로 저기 저 변호사 친구요. 저는 제 기존의 강점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겠다는 판단에, 분야를 도망쳐버립니다. 제 동기들은 저를 이상한 애로 기억할겁니다. 맞는 말이지요. 야자시간에 피시방을 가서, 두세시간 이상한 짓을 하더니, 돈을, 그것도 꽤나 많이 벌었다고 자랑하거나. (제휴마케팅입니다. 온디스크 등, 웹하드에 회원을 몰아다주면 당시에 돈을 줬어요.)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속독법을 혼자 연구하더니, 갑자기 성적이 확 오른다거나. 뭐 이런 요상한 맥락이요.

저는 이렇게 해야만,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지금의 강의 맥락도 이와 정확히 동일하지요. 제게 오시는 분들 나름의 장점도 좋지만, 이 자체로는 승부보기에 애매하다고 지레짐작해버립니다. 그래서 정공법을 피하도록 돕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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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슬퍼졌어요. 저렇게 우직하게 정점에 오르는, 정공법으로 산을 타는 친구들에 대한 동경이랄까요. 그렇다고 해서 정공법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각자 포지션마다의 전략이 존재하겠지요.

 

강의에 찾아오시는 변호사분들을 보면 정말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거든요. '그런갑다' 수준이었는데, 함께 삼년을 공부한 친구가, '내가 한번쯤 꿈꿔온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간만에 메이저 만화나 다시 펼쳐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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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리마티

    0
    3 month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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