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ut>이라고 써진 글자를 가리키며 이게 왜 더 비싼 거냐고 물었다. 남자친구는 어째서 그런 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정말 몰라?"라고 되물었다. 아직도 그 녀석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무식하면 당당하다더니. 지금 생각해보면 무식함이 빚은 참사였음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커피를 마셔본 적도, 커피의 여러 종류도 모르던 열일곱 살. 물론 남자친구에게 쪽팔려서 카페가 처음이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쪽을 주는 사람 앞에서 벌써 두 번째 난관에 봉착한다. 수많은 메뉴를 앞에 두고 도대체 뭘 시켜야 할지,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잘은 기억이 안 나는데 레몬차나 유자차 같은 커피가 아닌 것을 시켰던 것 같다. 커피를 처음 마셔보는 사람의 얼굴을 남자친구에게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는 아메리카노를 홀짝 마시며 괜히 창밖만 바라봤다. 중간중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혼자 피식 웃어댔다. 괘씸한 놈. 테이크아웃으로 꼽을 주던 남자친구가 괘씸해 속으로 이놈을 욕하고 있었다. 너, 정신을 차리라고. 쪽을 준 사람이 바로 너의 여자친구라고. 나도 우아하게 차 한 모금 마셨다.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유리로 된 찻잔이 찰랑이며 반짝거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설렘을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데이트인데!
그날 이후 친구에게 곧장 가서 데이트 브리핑을 열었다. 테이크아웃을 테이크아웃하고. "이놈이 나를 정말 좋아하긴 하는 걸까."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좋아하니까 만나는 거겠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카페 가봤어?" 친구는 롯데리아나 카페나 비슷한 거 아니냐고 모르는 소리를 했다.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는 마셔본 적 있다 했다. 맨날 아이스크림이나, 오렌지주스만 시켜보다가 한번 시켜보았다고도 덧붙인다. "그럼 우리 카페 가볼까?"
다음날, 친구와 나는 그를 만났던 문제의 그 카페를 찾아갔다. 이제는 알고 있는 ‘테이크아웃’이라는 글씨를 가리키며 친구에게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었다. 친구는 “가지고 나간다는 거잖아. 근데 같은 커핀데 왜 가지고 나가는 거랑 마시고 가는 거랑 왜 가격이 다른 거야?” 그래! 저런 취지였다고! 친구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떠들어댔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의 친구는 "그 녀석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억지춘향으로 내 편을 들어주었다.
친구는 쌍화차를 시키고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친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도 다시 한번 천천히 그곳을 둘러보았다. 짙은 갈색 나무로 짜인 바닥과 창틀, 꽃 자수로 도배된 오래된 소파.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음미했다. 처음 마셔보는 커피의 맛은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문의 맛이었다. 그 녀석은 어제 이런 걸 마셨구나. 어제 일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녀석은 누구랑 또 이런 델 와본 걸까. 여자일까.
이후로도 내게 카페는 오랜 시간 데이트 장소였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시켜놓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카페를 가면 편한 소파로 된 의자부터 찾았다. 사귀던 남자친구 중에는 카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데를 올 바에는 자기 자취방에서 치킨을 먹는 게 어떠냐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로 머릿속을 아리송하게 만들던 녀석도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평일 점심이면 매일 선배들과 카페에 갔다. 원두 가는 소리가 카페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팔짱을 낀 채 턱턱 음료를 고르는 선배들. 멋짐의 완성은 역시 점원에게 내미는 카드다. 진정 어른의 모습이다.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목에는 사원증을 걸고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걷는 모습. 나중에야 선배들의 잔액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선배 경력쯤 되어서 알게 되었다.
직장생활 10년 차가 훌쩍 넘고 보니 이제는 커피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상하게 종일 몸이 무겁고 졸리고 쳐져서 보면 커피를 거른 날이다. 동료에게 "우리 커피 안 먹어서 이 지경이에요"라고 말하면 옆에 동료도 깜짝 놀라며 "맞네, 맞아" 동조해주었다. 우리는 탕비실에서 커피믹스를 각자의 컵에 담고 “얼마나 바쁘면 커피를 거르냐”고 말했다.
어느 날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다가 주인공 지은이 회사에서 커피믹스를 훔치는 장면이 있었다. 나도 일을 하면서 그렇게 커피믹스를 훔친 적이 있다. 지은은 불 꺼지고 남루한 한 칸짜리 방에서 커피믹스 여러 봉지를 유리컵에 붓고는 뜨거운 물을 넣고 휘휘 저었다. 그 쓸쓸함에 나는 울고 말았다. 일을 쉬는 주말 낮에도 회사에서 훔친 커피믹스를 한 잔씩 마시며 침대에 눕고는, 봤던 드라마와 예능을 보고 또 봤다.
커피의 맛과 카페가 풍기는 분위기가 사람의 기질이고 아우라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내가 가진 기질과 아우라는 어떤 형태일까. 맛있다고 열 사람이 말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우악스러운 맛은 아니길 바란다. 우악스러운 맛. 나는 그런 커피를 ‘우악커피’라고 명명한다. ‘우악커피’라고 이름 지은 우악커피1호는 내 첫 직장생활을 도와준 스승님이 팔던 커피다.
스승님은 정신이 번쩍 드는 우악스러운 맛의 커피를 좋아했다. 그런 터프한 모습 덕에 나도 첫 직장에서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감사함과는 별개로 그분이 팔던 커피의 맛은 터프를 넘어선 공포였다. 한번 마시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띵하고 밤에 잠들 수 없었다. 밤새 글을 써야 했던 스승님에게는 적격의 커피였나보다.
스승님은 내가 커피 마시기를 주저하고 있으면 안색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내게 물었다. “커피 왜 안 마시니? 맛이 없어?” 그럼 나는 “아뇨, 커피 정말 맛있어요” 말하고 음미하는 표정까지 보여야 했고, 그제서야 스승님은 안심하셨다. 스승님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면 함께 간 선배와 나는 동시에 “저 집 커피는……”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그때는 그 커피가 정말 무섭고 마시기 싫었는데 가끔 그 커피가 생각난다. 심지어는 마시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우악커피, 그 커피 확실히 매력은 있다.
최서영
멋은 없어도 정은 있는 아기엄마. 과신 보다는 근심, 성공보다는 성실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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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영
왜 커피는 쓰고 텁텁한데 매일 찾게 되는 걸까요? 커피맛처럼 잘 미화되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힘들었던 기억도 커피맛처럼 아름답게 곱씹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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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솔파크
커피는 이제 욕망을 비추는 거울같아요. 커피를 대하는 태도, 어떤 커피를 마시는 지에서 그 사람이 뭘 쫓는 사람인지 보이고요. 우연히 발견한 뉴스레터 잘 읽고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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