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 범주에 있는 사람이야.

#4. 나는 참

2024.02.02 | 조회 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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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부끄럼 많은 사람.

어릴 때의 몇몇 사건들이 그런 나를 만든 줄 알았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그냥 부끄럼 많은 내가 그 사건들을 만든 것 같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몇째날 밤 즉흥 디스랩을 만들며 놀던 친구들을 보며, 나는 죽어도 저기에 낄 수 없겠다 생각했다. 하나같이 새까매진 천장을 바라보며, 나 혼자 내는 목소리라니, 거기에 누군가를 디스하고, 박자도 맞아야 하고, 내용도 웃겨 대부분이 웃거나 감탄해야 한다. 마치 키가 작은 사람이 커지려고 노력하듯, 우유를 먹고, 매일 아침 줄넘기를 하고, 성장에 방해되는 음식은 피하며, 자세를 바르게 하듯이, 나에게는 그 디스랩이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숨쉬듯 하는 사람이 있다. 밥먹고 똥싸기 밖에 한 게 없는데 키가 185는 훌쩍 넘는 재수없는 친구를 보는 기분이다. 수학여행날 밤 친구들과의 디스랩도 재능이라면 재능인가 보다.

꽤나 긴 부끄러움의 역사는 내 말과 글에 수많은 범퍼를 만들었다. 큰 체감없이 유려하게 대화 주제를 돌리거나, 대화가 너무 진지해져 내 지루함이 들킬 것 같으면 상황이 유쾌하게 받아들여지도록 시덥잖은 소리를 괜히 추가한다. 아니면 그냥 확 진지해져 버린다. 덕분에 나는 어느 누구와도 큰 불편함 없이 대화하거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진지하고 쓸모없고 부질없어도 밤새 미친듯이 떠들어 줄 사람을 찾곤 한다. 늘 앞으로 던지던 공을 뒤로 던져볼까 했을 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하던 대로나 하라며 질책하지 않는 사람. 수많은 생각의 덩어리 사이에서 톡 튀어나온 내 말을 포크볼을 무리없이 잡아내는 포수처럼 받아줄 사람. 생략적이고 개연성 없어도, 무의식이면 무의식인대로 흐려가듯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내 세상에 굴러들어와도 그냥 돌아다니며 나를 구경해줄 사람. 어쩌면 내 친구의 정의는 그런 것일지 모른다.

너무 어려워 보이는 일들에 친구는 없으려나 싶다가도, 어느새 내 범주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생겨 고맙다. 범주, 이 말도 내 친구가 해준 말이다. 넌 내 범주에 있는 사람이야. 치킨이었나 곱창이었나 소주였나 맥주였나 하여튼 기름지고 도수 높던 자리에서 들은 그 말을 아마 그 말을 건넨 친구보다 소중히 기억한다. 내가 툭 던진 생각과 말들을 쭉정이 취급하지 않고 귀하게 받아주는 이들에게 소중함과 따뜻함을 느낀다. 그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의 반의어로서의 자유를 얻는다. 이제 이 글의 주제를 부끄러움으로 할지, 친구로 할지, 고백으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괜한 간지러움과 부끄러움을 또 느낀다.


추신1

혹한기를 지내고 나니 채소에 바람이 든 것처럼 몸이 마음 같지가 않습니다. 쇠약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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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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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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