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 만에 완성되는 영화?
‘3부작 영화’라고 하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는지? 대부와 스타워즈?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영화를 좋아한다면 요아킴 트리에의 오슬로 3부작이나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시리즈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테다.
오늘은 유난히 필모그래피가 세 편씩 맞아떨어지는 독일의 감독을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크리스티안 페촐트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했던 빔 벤더스가 과거 뉴저먼 시네마를 이끈 인물이었다면,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현세대 독일 영화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나름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어, 감독 전도 종종 열리는 편이고 최근에는 감독 본인이 가족과 함께 내한하기도 했다.
📜 역사 3부작
페촐트의 3부작이라고 하면 흔히 ‘유령 3부작’과 ‘역사 3부작’ 그리고 ‘원소 3부작’을 이야기한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역사 3부작과 원소 3부작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먼저 <바바라>(2012)와 <피닉스>(2014), 그리고 <트랜짓>(2018)으로 이어지는 역사 3부작이다. 독일 감독에게는 어쩌면 일종의 통과 의례처럼 느껴지는 주제가 바로 역사일 것이다. 세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역사적 사실을 고유한 방식으로 풀어내는데, 그 시선이 무척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1980년대 동독을 배경으로 한 <바바라>와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이야기를 다룬 <피닉스>는 한국 팬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영화일 것이다. 둘에 비해 <트랜짓>은 다소 생소하지만, 셋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동독의 작가 안나 제거스가 나치 하에서 망명 생활을 전전하며 쓴 소설 <통과비자>를 21세기의 무대에서 재창조했다. 페촐트는 보통의 시대극과 달리 과거와 현재를 말 그대로 겹쳐 보여줌으로써 과거의 아픈 상처를 뚜렷하게 조명하면서도 현시대에도 같은 문제(영화에서는 난민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 원소 3부작
원소 3부작은 아직 두 편밖에 제작되지 않았는데, <운디네>(2020)와 <어파이어>(2023)가 그것이다. <운디네>는 물을, <어파이어>는 불을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중 가장 최근작인 <어파이어>는 나와 같이 평소에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영화는 여름휴가를 보내는 네 남녀의 우연적인 만남으로 전개가 시작되는데, 주인공인 레온은 휴가에 와서도 원고를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즐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원고를 집중해서 마치지도 못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리며 남에게 짜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보다 보면 짜증이 치솟으면서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핑계로 엄마에게 툴툴거렸던 학창 시절이 떠올라 괜히 뜨끔하기도 했다. 상황 탓, 사람 탓하며 내 인생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불만이 가득한 사람에게 이 영화는 일종의 거울 치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두 명의 페르소나
5편의 영화는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두 명의 배우가 각각 나누어 연기했는데, 니나 호스가 바바라와 피닉스를, 그리고 트랜짓•운디네•어파이어는 폴라 비어가 맡았다. 공교롭게도 두 배우 모두 페촐트와 함께한 영화를 통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쪽은 단연 니나 호스이다. 아마 드라마 <홈랜드>를 보았다면 익숙할지도 모르겠다(내가 그랬다). 그는 2005년부터 페촐트 감독과 함께했던 감독의 페르소나 중 한 명으로, ‘사연 있는 여주’ 역할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낸다. 무언가에 의해 억압받고 고통받는 와중에도 항상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데, 그 때의 결연한 그의 표정은 몇 마디 대사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 영화에서 모든 장면은 두 번 반복된다?
페촐트는 내한했을 당시 이동진 평론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영화 속에서 특정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와 많은 각본을 함께 썼던 스승이자 친구인 하룬 파로키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영화에서 모든 공간이 두 번 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같은 공간이 두 번 나오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이야기가 됩니다. 굳이 이야기를 직접 할 필요 없이 그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죠.
좋은 작품이란 그런 게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온 도시의 풍경은 다를 바 없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져 있는. 내게는 페촐트의 영화가 그러했고, 그렇기에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다.
Today's Question
트뤼포가 말하길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 이상 본 영화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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