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대를 마주하는 방식

2023.03.31 | 조회 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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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 레터

말랑말랑 밥풀과 바삭바삭 누룽지

고백하자면 3월 31일 저녁이 되어서야 누룽지 레터를 쓰기 시작했다. 3월 31일에 보내야 하는데 말이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은 다음 침대에서 좀 뒹굴뒹굴거리다 겨우 몸을 일으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동안 생각해온 초안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목으로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기대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기대를 받았던 적은 언제였나 돌아본다.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가족의 기대를 가득 받고 자랐을 테지만, 내 기억 상으로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유난히 나를 예쁘게 봐주었다. 나라는 아이가 무척 기대된다고 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었다(쓸데없이 솔직한 성격은 엄마한테서 물려 받은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기대에 관한 최초의 기억인 이유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이 실망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은 기대에 관한 최초의 기억이 아니라 실망에 관한 최초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기대와 실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안다고 해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기대를 받으면 '실망하면 어쩌지' 겁을 먹게 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실망하면 어쩌지'는 '실망하게 될거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내가 기대를 마주하는 방식은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친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았고, 내가 외고에 합격해서 기대에 부풀어 있던 부모님께 외고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나의 글을 기대하고 기다렸던 누군가에게는 끝끝내 글을 숨겼다.

그럴수록 나만 손해였다. 내가 저버리는 건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외로워지는 것도 나였고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나였고 이해 받지 못하는 것도 나였다. 그때는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가 되면 누군가를 실망 시킬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내가 너무 잘하고 싶었다는 것을. 기대가 어긋났을 때 가장 실망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는 것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애초에 판을 다 엎어버렸다는 것을.

아까 침대에서 뒹굴뒹굴 거리면서 생각했다.

'아. 나 또 기대 받는 것이 부담되는 구나.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 말은 참 소중한 말인데, 사실은 저버리고 싶지 않은데, 또 그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있구나.'

그런 나의 습성을 마주하고 극복하기 위해 <누룽지 레터>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밥풀만큼의 작은 시도로부터 시작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누룽지 앞에서라면, 극복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기대를 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저버리고 싶지 않은 기대 말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긴 편지가 되고 말았다. 어지러운 머릿 속과 달리 이 편지는 정갈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모순인 걸까. 어쨌든, 나는 이제 미루고 미루다가도 한 달에 한 번은 이 혼잣말 같은 편지를 쓸 것이다. <누룽지 레터>를 기대하고 있는 누룽지들에게, 이 편지가 잘 도착하기를 나 역시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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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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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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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리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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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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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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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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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imshimp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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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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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esung._.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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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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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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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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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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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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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m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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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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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른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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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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