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누구도 아닌 나였구나

구독자님은 '영화제'에 가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마침 엊그제 전주국제영화제의 온라인 예매가 시작되기도 했는데요. 아마 영화에 큰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도 우리나라의 가장 큰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는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아요. 음악영화를 주로 상영하고 공연도 함께 하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올해로 23회를 맞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재기발랄한 단편영화들이 넘치는 미쟝센단편영화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찐'장르영화를 소개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있죠. 또 쉽게 볼 수 없는 세계 각국의 다큐멘터리들을 소개하는 EBS 국제다큐영화제, 작지만 큰 마음을 담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인디포럼과 같은 영화제들도 있습니다.

영화제는, 특히 영화제 이름에 지역명이 들어가는 영화제들은 그야말로 '축제'여서, 영화를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 말고도 관객 이벤트라거나, 음악 공연이라거나 하는 부대행사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영화를 사랑하고 시간이 있는 대학생들이 같은 유니폼을 챙겨입고 '자원활동가'로 활동합니다. 티켓 부스에서 발권을 돕거나, 상영관 입장을 돕고, 공연장 질서를 유지하고, 해외에서 온 게스트의 통역을 맡거나, 개폐막식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에서 인간 안내선이 되기도 해요. 

저는 대학생 시절에 영화제 자원활동을 즐겨했었어요.

자원활동가를 하면서 만나는 동료들은 거의 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는데, 정작 자원활동을 하면 시간이 없어서 영화를 보기는 힘들거든요! 그런데도 왜 몇 번에 걸쳐 영화제 자원활동을 했을까 돌이켜 보면, 저는 영화도 좋아했지만 '축제'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맡은 일을 서로를 믿고 해 내면, 상상 속에만 있었던 행사가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진짜로 우리 티켓 부스에서 티켓을 발권해서 내가 지키는 상영관에 관객이 올 때, 그게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몇 번의 영화제에 참여하고 나서, 영화제의 스태프 분들과도 인연을 쌓게 되면서 그 분들을 통해 행사 운영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덕수궁 즉조당 앞뜰에 무대를 꾸리고 창작 국악공연을 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날 좋은 봄에 덕수궁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국악은 그곳에 얼마나 아름답게 어우러지던지. 국악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지만 몰라도 듣기 좋다~하면서 몇 주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 날. 마지막 연주자의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연주자는 '푸리'라는 팀이었어요.

저는 이 날 연주자 대기실 담당이어서, 공연 전에 물과 다과를 챙겨 드리는 것 외엔 딱히 정해진 일이 없었는데요. 공연이 다 끝나고 대기실에 괜히 찾아가 필요한 것은 없으시냐며(공연 다 끝났는디) 고생하셨다는 말을 몇 번이나 외치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자룡, 활 쏘다>가 정말 충격적으로 좋았거든요. 마지막에 부채가 휘- 날아가는데 비명과 박수가 절로 나왔습니다. 스물 몇 해를 사는 동안 어쩐 일인지 판소리 적벽가를 들어볼 기회는 없었고, 적벽대전은 오우삼 감독님 영화로만 접한 저로서는(그것도 양조위 금성무 오빠들 나오셔서 봤기 때무네..) 실상 앞뒤맥락도 몰랐는데도, 빠른 장단을 따라가는 피아노와 그것을 휘어 감는 것 같은 힘찬 소리가 어쩐지 전쟁 통의 용맹한 조자룡을 보여주는 것 같았달까요.

아무튼 그 날 이후로 저는.. 정재일 님의 소곤소곤하고 다양한 활동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고.. 장민승 님과 작업한 전시도 보러 다니고.. 한승석님과 함께 낸 <바리abandoned> 앨범 발매 기념 공연도 가고..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라왔던 연극 <그을린 사랑> 보러 갔다가 음악감독이 정재일 님이어서 혼자 설레기도 하고.. 그렇게 재일님이 성실하고 꾸준하게 세월을 쌓으시더니 어느 날 너의 노래는 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기고 자꾸 나라에서 찾고 급기야 2020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재일님 작품이 몇 번이나 울려퍼지지 않았겠어요..??

아무튼 오늘도 이렇게 먼 길 돌아왔습니다만..👀

정작 오늘 말하고 싶었던 콘텐츠는 웹툰 <정년이> 입니다. 어제 퇴근하고 돌아와서 단행본 첫 번째 권으로 시작해서,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은 2부 마지막까지 스무스하게 정주행을 끝냈어요.

<정년이>는 1950년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웹툰입니다. 주인공 윤정년은 고향 목포에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가난한 살림을 꾸리다가, 부자가 될 길은 국극배우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국극단을 따라가 연구생으로 입단하게 되는 씩씩한 10대 여성이에요.

저는 <정년이>를 통해서 여성국극을 처음으로 알게 됐는데, 웹툰 속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실제로 여성들만이 단원이었고, 여성 국악인들이 남장을 하고 공연을 했고, 남자 역을 하는 배우들을 좋아하는 열성 팬들이 많았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현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기도 하죠. <정년이>에서는 동료 연구생(현대의 연습생..!)들 개개인의 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국극의 문화들을 보여주고, '성장물' 장르의 클리셰를 구현하기도 하고,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한 여성의 낮은 인권에 대한 의식도 다룹니다.

그 중에 저에게 제일 깊은 인상을 준 인물은 백도앵이에요. 도앵(성님)은 정년이의 짝선배이고, 매란국극단 단장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도앵은 이야기 초반부터, 국극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하지만 정작 노래를 잘 하지는 못한다는 설명이 많이 나와요. 도앵이 왜 소리 연습에는 열심할 수 없었는지, 거기에는 도앵의 아버지와 출신 성분과 도앵의 성격과 같은 다층적인 이유가 있어요. 도앵이 "난 말이야. 여자가 미웠다." 하며 한 계단 위로 올라가는 순간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스스로를 깨끗하게 마주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부럽고도 아름다웠어요.

<정년이>는 지금 2부를 마치고 휴재 중입니다. 6월 7일(월)부터 3부 연재가 다시 재개된대요. 모두들 6월 전에, 이 푸르른 여름 같은 웹툰을, 여자만 왕창 나오고, 깔끔한 작화와 신선한 소재와 아름다운 인물들이 빛나는 이야기를 만나보시길 바라요. 🕊

🧐 왠지 여성국극이 더 궁금해지셨다면

<왕자가 된 소녀들>은 그 시대 실제 여성국극 공연을 올렸던 배우들과 팬들, 지망생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요. 지금은 왓챠와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 여자만 나오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는데..?

<까라!>는 한켠 작가님의 소설로 1930년대 경성과 평양을 배경으로, '축구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정년이>를 보면서 <까라!> 생각도 많이 났어요. 

👀 레어의 '제발 이 노래도 듣고 가세요 - 정재일 편' 

'아마, 아마, 메로 아마'는 <바리abandoned> 앨범의 수록곡입니다. 이 앨범은 바리공주 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고,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성찰이 노랫말에 함께 담겨있는데요. '없는 노래'도 그렇고, 이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을 정말 다 좋아해요.

'아마, 아마, 메로 아마'는 네팔어로 '엄마, 엄마, 나의 엄마'라는 뜻이고, 노랫말은 한국에 노동자로 왔다가 과로사한 이주 노동자 '마덥쿠워' 씨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눈물이 많은 분이라면 조심하세요..

인스타그램 @__of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