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우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

어제 - 8월 27일 - 는 제가 스웨덴에 온 지 딱 한 달 되는 날이었어요.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다들 시간이 어쩜 이렇게 빠르냐는 반응이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첫 한 달을 지낸 숙소를 정리하고 내일 이사를 하는데, 기분이 묘하네요.

한 달 동안 지낸 소회를 간단히 적어서 브런치에 올려 보려고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간추리기가 어려웠어요. 학교 안과 밖, 학교 안에서도 같은 프로그램 친구들과 다른 프로그램 학생들, (집)주인님, 가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성당에서, 이 곳에서 오래 산 친구, 이 곳에서 오래 산 다른 아시안 친구들, 혼자 관광객들 사이에 슬쩍 섞여 있을 때의 스톡홀름이 모두 달랐거든요. 제 아이폰도 지금 제가 여행을 하는지 살고 있는지 헷갈리는지 여행 비디오를 만들었다 말았다 하네요. 👀

그 중에도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고민한 질문을 꼽으라면 '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일 것 같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어디에 있든 제 자신을 소개할 때 저의 직업, 직장, 전 직장, 졸업한 학교, 거주하는 지역 같은 것을 말했는데요. 취미, 특기, 취향, 관심사 같은 것은 조금 덜 중요하게 이야기하거나 특정한 모임에서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여기 언제 왔고 왜 왔냐 입니다. 그러면 저는 알아서 나는 한국에서 왔어, 부터 시작하지요. 한 달 동안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제일 많이 자각하게 된 것 같아요. 쉽게 관심을 끌기 위해(?) 케이팝을 언급한다거나, 돌아오는 '나 그래도 한국 음식 좋아해 비비밥..' 같은 대답에 심드렁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그러다 보니 이들에게 '한국인'이란 뭘까, 날 어떻게 볼까, 그건 이곳에서 살기에 유리한 것일까 불리한 것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구독자님은 유리 절벽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유리 천장 말고 유리 절벽이요. 위키피디아에서는 유리 절벽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어요.

총리로서 해야 할 첫 번째 임무가 브렉시트 협상이었던 영국의 테레사 메이 전 총리가 유리 절벽 현상의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의 주인공 김지윤(산드라 오 분)은 펨브로크 대학 영문학과 최초의 여성, 아시안 학과장이 됩니다. 영문학과가 위기 오브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요. 유리 절벽 끝에 서 있습니다. 학장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일을 해결하려고 지윤이 학과장이 되자마자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학과장으로서 열정과 비전이 있던 지윤은 일단, 똥부터 치워야 해요.

지윤이 풀어야 할 과제를 적어봤습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될 수록 이 리스트는 점점 더 길어지기만 합니다.

솔직히 산드라 오의 필모그래피 중 많은 작품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꼽으라면 <킬링 이브> 정도일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다소 섣부른 이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산드라 오의 연기는 '저렇게 살고 싶다' 라는 마음을 들게 하는 점에서 엄청나게 강력하다고 생각합니다. <킬링 이브>의 이브와 <더 체어>의 김지윤을 보면, 겉과 주변을 기준으로 하면 딱히 와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은 아니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산드라 오는 이브와 김지윤을 좀 울더라도, 좀 무섭더라도, 하려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냅니다. 지윤에게는 삶의 문제가 산적해있어요. 유리 절벽에 서서 바라보면 이런 것들이 보입니다. 퇴직을 권유해야 마땅한(?) 노교수들, 그녀를 압박하는 학장, 작은 사고를 큰 사고로 굴려내는 재주가 있는 동료 교수(이자 office spouse),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동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딸 쥬쥬, 조곤한 말투로 속 터지는 얘기를 하는 아빠..

그런데도 저는 <더 체어>를 보면서, 특히 지윤이 결국 딸 쥬쥬와 아빠 앞에서 눈물을 터뜨린 이후에 지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다 놓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한 순간에도 지윤은 지금까지 믿어오고 경험한 가치와 '마음이 시키는 일' 사이의 밸런스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거든요. 그게 지윤이 가진 진짜 힘이고, 보물이고, 그 점을 닮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이건 분명히, 동양인이자 여성 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 다듬어진 산드라 오라는 배우 그리고 사람의 힘이 지윤에게도 깊이 배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체어>는 에피소드 당 30분이 넘지 않고 시즌 1이 6개 에피소드로 되어 있어요. (*어느 리뷰에서는 한 시즌 전체가 <아이리시 맨>보다 짧다고 설명하더라고요) 길지도 않은데, 좋기까지 하니까 안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구독자님은 <더 체어>를 보고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 닿을지. 궁금해요! 👩🏻‍🏫

💪🏻 아시안, 여성, 영문학 교수가 본 <더 체어>

🥰 킬링 이브 + 산드라 오 + 샤론 최 = 🥰

🌷 그레이 아나토미 지금이라도 봐 어떡해

인스타그램 @__of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