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아요, 다들 잊고 사니까요.

지난 주에 <애플>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

아마 구독자님도 포스터를 보면 위 두 문장의 홍보 문구와 아래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게 와 닿으실 것 같아요. 보시다시피 홍보 문구에서는 딱히 장르를 유추해 내기 어려운데요. 그래서 저는 이미지를 봤을 때.. 이 영화가 약간 기괴한 미쟝센의 스릴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관에 가면서 왓챠피디아에 검색해보니 분류가 드라마/코미디 더라고요? 

'제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니, 그럼 저 코미디가 약간 블랙코미디인가 보다.. 정도의 생각만 품은 채로 영화를 봤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는, 지독한 기억상실을 일으키는 정체 모를 전염병이 퍼진 세상이에요. 도시 곳곳에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발걸음을 멈춰버리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들은 곧 병원에 수용된 채로 이들을 찾는 가족이나 지인이 찾아올 때까지 대기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종점에 멈춘 버스에서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됐고, 병원에 수용되지만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의사는 '아예 새로운 사람이 되어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제안합니다.

구독자님, 만약 영화 <더 랍스터>를 보셨다면.. 아마 지금쯤 떠올리고 계실 것 같아요. '제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라더니, 세계관 설정하는 느낌이 좀 비슷한데..?!' 같은 생각하시지 않았나요?!

<더 랍스터>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15년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세계에서는 '짝을 찾지 못하면' 교외의 한 호텔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그 호텔에서 45일 내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요.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주인공도 이 호텔로 보내져서 새 짝을 찾아야 하는데, 막상 짝을 찾아야 할 때는 못 찾더니 찾지 말랄 때 찾는.. 이야기입니다.

저에게 <더 랍스터>의 '블랙코미디적' 순간들은 대부분 세계관을 유지하는 제도나 설정들이 나올 때 였어요. 예를 들면 처음 입소할 때 주인공이 입소 인터뷰(?) 같은 것을 하면서 성적 지향을 '바이섹슈얼'로 해도 되냐니까, 담당자가 그건 지난 여름부터 금지됐다면서 남자, 여자 중에 택일해야 한다고 할 때요. 신발은 반 사이즈가 없으니 조금 크게든, 작게든 정사이즈를 신어야 한다고 하거나요.

<애플>은 <더 랍스터>와 비교하면 이런 세계관 설명에 열심이지는 않더라고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친구와 한참 그런 얘기를 했는데요, 새 인간으로 사는 사회 적응 프로그램이 한 종류인거 너무하지 않냐, mbti도 16가지인데.. 등 어떻게 생각하면 설정 오류? 부족? 같이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 있었어요. 대신 <애플>은 <더 랍스터>보다 더 은유적이랄까요, <더 랍스터>가 아주 직접적인 비유나 쉬운 상징으로 설명한 것들을 조금 불친절하게 표현했던 것 같아요. 

<애플>에서 사과를 포함한 몇 가지 아이템들이 품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있을까, 를 생각하다보니 <킬링 디어>도 생각이 났습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기 전에 포스터만 보고 예상했던 <애플>의 분위기는 <킬링 디어>에 가깝기도 했고요.

하지만 도무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가 들어찬 플롯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음악, 불안하게 만드는 줌 장면, 그리스 신화에서 온 모티브 같은 것들이 <킬링 디어>의 핵심이라면 <애플>은 긴장과 불안은 덜하고 대신 주인공 인물 한 명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는 것이 좀 더 중요해 보여서, 결론적으로는 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애플>에 이런 대사가 나오는데요, "괜찮아요, 다들 잊고 사니까요." 따지고 보면 <킬링 디어>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유효한 말이기도 하니까..! 괜히 혼자 소름이 돋고 그랬습니다.

오늘은 <애플>의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왜 '제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인지'에 꽂히면서 생각한 것들을 적어봤어요. 영화 톤이 비슷해서, 같은 그리스인 감독이어서, <송곳니> 작업 때 같이 일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나름 찾아봤는데요. 제 나름의 결론은 '그래도 둘은 되게 다르고 그래서 좋다'가 되었답니다.

더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이야기가 지금의 제 취향에는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애플>은 이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기 때문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제 취향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요. 세상은 아직 살만하네요! 이렇게 잘하는 이야기쟁이들이 다양하게 많으니! 🍏 

*<애플>은 지금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입니다! 그래서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은 최대한 쓰지 않았어요. 제가 이렇게 애썼으니까(?) 꼭 영화관에서 보시길..! 그리고 영화 보고 제 레터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더 재미있겠죠? (우기기)

🍿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 양반이 궁금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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