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까?”
사회 초년생 시절, 베테랑 선배들을 보면서 나의 부족함을 질책했던 시기가 누구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어느 순간, 더 이상 채울 곳이 보이지 않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 ‘피크를 찍은 뒤 서서히 내려가는 것 같은’ 두려움과 무기력함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김부장〉에게 공감한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광고 업계에서 성공의 상징처럼 불리던 오늘의 주인공도 2년 전, 그 벽 앞에 가로막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돌파 대신 회피를 택했고, 성실한 삽질 대신 엉뚱한 딴짓으로 도망쳤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지만, 뜻밖의 수확은 있었습니다.
오늘의 인터뷰는 인생의 벽 앞에서 ‘회피는 곧 실패이자 패배’라고 믿어온 분들께 건네는 아주 작은 면죄부이자, 어쩌면 큰 용기가 될 이야기입니다.
오프더모먼트
< 송재원 감독 (스튜디오'좋' 대표) >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송재원(이하 송) : 안녕하세요. 스튜디오‘좋’이라는 광고대행사에서 광고랑 브랜디드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송재원 감독입니다. 빙그레우스 캠페인, 새로 소주의 구미호 ‘새로구미’, 김지석씨가 출연한 ‘미원 캠페인’, 페이커의 ‘불좀꺼줄래?’ Klevv 캠페인 등 컨텐츠 같은 광고, 광고같은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장 :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소개를 부탁드릴까 봐요. 저희 인터뷰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코너니까, 요즘 ‘송재원 감독’ 말고 ‘사람 송재원’을 소개한다면 어떻게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송 : 아, 네. 이렇게 할까요? 잘 지내고 있다기엔 애매하고, 힘들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그 중간 어느 시기를 막 지나온 송재원입니다.
장 : 애매한 중간이라는 게 어떤 느낌일까요?
송 : 글쎄요. 좋아하는 일이고 여전히 재미는 있는데, 점점 고갈되어 가는 상태를 한동안 겪었어요. 저 개인적으로 한 2년 전쯤에 피크를 찍었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장 : 아, 2년 전이면 각종 광고제에서 상을 휩쓸고, 또 카카오엔터의 자회사가 되었던 때인가요?
송 : 맞아요. 그런데 그런 외부적인 성취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일에 ‘얼추 와꾸가 선다’라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약 80~90% 정도는 예측이 되는 거죠.‘이거면 상대방이 오케이를 하겠다’, ‘시장에 내보이면 반응은 이 정도 나오겠다’라고요. 그런데 이게 숙련도이고 내 노력의 산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창작자로서는 되게 무서운 지점이더라고요.
장 : 흔히 말하는 번아웃이랑은 좀 달랐을까요?
송 : 어느 정도는 결이 맞닿아 있죠. 열정이 식고 나 자신이 관성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니까요. 이게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모든 콘텐츠를 다 소비해버린 상태 같은 거죠. 소위 ‘고여버리니까’ 흥은 안 나는데, 인생은 게임처럼 로그아웃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이니까 계속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리막인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광고제 시상식에 가서 앉아 있으면, ‘작년에는 저 자리에서 내가 대상을 탔는데 올해는 상격이 낮아졌구나. 내 기량이 떨어져 가나?’라는 의구심이 드는데, 분명 처음엔 작은 상을 탔을 때도 엄청나게 기뻤단 말이죠. 만족도의 역치가 너무 달라져 버린 거죠.
장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아닌 대표니까, 계속 해나가야 했을 텐데 쉽지 않았겠어요.
송 : 맞아요. 그래서 회사 규모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관리’의 영역에서 레벨업을 해보자, 시스템도 만들고, 저와 아내(공동대표인 남우리 CD)가 함께 만들어낸 그 감각을 다른 동료들에게 더 많이 이식해 보고자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마음만큼은 잘 안됐어요. 창작자로서 작품을 만드는 건 익숙한데, 사람을 성장시키고 이끌어내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부딪히면서 ‘그럼 이제 뭘 하지?’라는 허탈감이 왔어요.
장 : 그러게요. 이게 다음 단계인가? 했는데 통제 불가능하다는 걸 느꼈으니 그다음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있었겠어요. 그나저나 이런 고민이 있으셨을 거라고 주변에서 생각을 못 할거 같아요. 솔직히 스타트업 세계에서 대기업에 인수되거나 매각되면 초대박이라고 하잖아요. 진짜 엔딩처럼 느껴지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고요. 저 역시도 사실 ‘와, 부럽다. 재원 님은 엄청 부자겠지? 무슨 고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송 : 맞아요. 그렇게 느낄 수 있죠. 하지만 각자 시기와 규모가 다를 뿐, 우리 모두 언젠가는 사회 초년생 때 목표로 세우고 맹렬히 달렸던 지점에 얼추 도달하는 시기가 오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 시기가 되면, 참고할만 레퍼런스도 없고 이끌어줄 선배도 없는 거예요. 주변에 조언을 구해봐도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거나 ‘에이, 잘 하고 계시면서~’로 퉁 쳐지는 거죠. 생각해 보니, 초심자의 열정과 성장을 다룬 콘텐츠도 많고, 성공한 위인들의 업적과 가르침을 다룬 콘텐츠도 많은데, 그 중간 즈음을 다루는 게 있나? 잘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장 : 그래서 〈김부장〉 드라마도 참 많은 공감을 샀던 것 아닐까 싶네요. 그 이후의 허탈감이나 방황의 느낌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을 거고, 그 시기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삽질’을 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송 : 맞네요. 아직 안 봤는데 빨리 봐야겠어요.
장 : 어쨌든 재원 님은 아까 인사에서 ‘그 시기를 지나왔다’고 하셨으니, 지금은 그 허탈감에서 빠져나오셨다는 건데요. 그 돌파구는 무엇이었나요?
송 : 저는 돌파를 안 했는데요?
장 : 예? 그럼요?
송 : 저는 돌파 대신 회피를 했죠. 원래 타고나기를 즉흥형이자 회피형이고, 고양이과의 인간이거든요. 에너지가 고갈되기 전에 제가 저를 먼저 꺼버리는 편이에요. 대략 앞으로가 예상이 되니까, 진심을 다하기 전에 우선 다른 길을 찾아보는 거죠. 그래서 이번에도 좀 도망을 쳤어요. 그게 게임이랑 폰트 만들기 였는데요. 특히 지난 1년 동안은 ‘새티스팩토리(Satisfactory)’라는 공장 자동화 게임을 1,100시간 넘게 했어요. 어떤 가상의 외계행성에 자동화 공장을 설계하고, 자원을 캐서 부품을 만들고, 본사에 납품하는 그런 게임인데...
장 : 죄송한데 잠시만요. 1,100시간이요? 아니, 질리지 않고 계속하신 건 원래 성향이라고 치고, 대체 언제 게임을 하신 건가요? 회사 경영에 일곱 살짜리 아들 육아도 하시는데요.
송 : 일 끝나고 아이 재우고, 아무도 없는 밤 시간에 방해받지 않고 켜는 거예요. 새벽 네 시, 다섯 시까지 하고 쪽잠 자고 출근한 날도 많았어요. 미친 거죠.
장 : 대표님이 이렇게 지내면 주변에서 뭐라고 안 해요? 직원들이나 배우자, 아니면 회사에서도 걱정했을 것 같은데요. 스스로도 ‘이거 현실 도피 아닌가?’ 싶지 않았나요?
송 : 완전 현실 도피 맞죠. 인정합니다. 다행히 회의 시간에 졸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웃음) 1,100시간 하면서 제가 깨달은 게 있는데요. 제가 그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가 ‘혼자서도 해결 가능한 변수’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거더라고요. 효율적인 공장을 만들기 위해서 시스템을 설계해야 하는데, 너무 뻔하면 재미없고, 통제 불가능하면 공포인데 딱 그 중간인 거죠. 그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쾌감이 힐링 이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는 문제를 해결해 예상대로 잘 돌아가는 걸 지켜보는 느긋한 순간을 좋아하는구나!’를 깨달았어요. 돌이켜보면 광고 콘텐츠 만들어서 사람들의 댓글과 바이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뿌듯해하는 것도 마찬가지 더라고요.
장 : 게임 안에서 ‘내 일’의 즐거움이 뭐였는지 다시금 깨달은 거네요?
송 : 네. 그런데 약간 다른게 있다면 현실의 일은 좀 더 변수투성이잖아요? 사람 스트레스나 외부요인은 천재지변에 가까우니까요. 특히 연차가 차면서 더 그런 게 주니어 때는 ‘나만’ 잘 하면 해결되는 일들 위주로 배정을 받았는데, 시니어로 갈수록 ‘나만’ 잘해서는 해결 안 되는 일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취미가 낚시, 골프, 가드닝, 등산 쪽으로 많이 기우는가? 싶었어요.
장 : 그게 재원님에게는 게임이나 폰트 만들기 같은 거였던 거네요. 약간의 숨통이었달까?
송 : 네. 사실 게임이든 폰트든, 숨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본업이랑 관련 없는 ‘딴짓’이거든요. 그런데 그 골방에 처박혀서 혼자 무언가를 뚝딱거리며 만드는 시간은 익숙해진 본업과 다르게 ‘재미’가 있어요. 딴짓을 할 때 저는 초심자로 돌아가잖아요. 이게 되네? 이건 왜 안되지? 고민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실험해 보는 과정을 즐길 수 있어요. 효율이랑은 거리가 멀죠. 대신에 본업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흥미’가 돋아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딴짓이 꼭 시간 낭비로 끝나지만은 않더라고요.
장 : 어떤 의미죠?
송 : 공장 자동화 게임을 하다가 문득 “어? 지금 우리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이 공장 라인이랑 똑같은데?”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게임을 하면서 배운 효율적인 공정을 회사 업무에 적용해 봤어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회사 운영에서 막혔던 난제들이 풀리기 시작한 거죠.
장 : 도망친 곳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웠는데, 그게 다이아몬드였던 느낌이네요?
송 : 맞아요. 딴짓을 통해 얻은 부산물이 본업과 연결되는 순간에 ‘어? 딴짓하다 새로운 무기를 얻어서 본진으로 돌아왔네?’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최근에는 폰트를 더 잘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바이브코딩’을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근데 원래 프로그래밍을 전혀 못하던 제가 코딩을 배우는 과정에서 만들 수 있는 게 많아지면서 아이디어의 한계가 확장되었어요. 딴짓이 레벨업을 하고, 또 그 레벨업이 제 업이랑 연결되는 거죠, 그래서 제 다음 목표 중 하나는 이것들로 일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드는 거예요.
장 : 와, 이 말씀을 듣다 보니, 작년 여름에 내신 책 《납득되는 몰상식한 아이디어》에서 이야기하신 창작의 3단계가 떠올라요. 당시 후배 창작자들에게 창의성은 ‘파격, 크리에이티브, 렐러번스(연결성)’가 함께 가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송 : 네, 그게 이 이야기랑 어떻게 연관되셨나요? 오히려 제가 궁금한데요.
장 : “파격은 익숙한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죠. 40대의 가장이자 대표인 재원 님이 돌파구를 찾기보다, 골방에서 게임과 코딩을 하며 밤을 보낸 것 자체가 삶의 문법을 깨는 파격이기도 하고요. 또 만렙을 찍은 자신을 전혀 새로운 필드에 던져서, 다시 1레벨의 주니어로 만든 선택이기도 했고요.
송 : 맞아요. 그 덕분에 오랜만에 성장의 맛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장 : 그리고 그 새로운 필드 안에서 다시 크리에이티브 한 사고를 거쳐, 결국 거기서 얻은 전리품을 본업으로 가져와 ‘렐러번스’를 만든 거고요.
송 : 와, 소름 돋네요. 이렇게 꿈보다 해몽이라니! (웃음) 그런데 진짜 맞아요. 우리는 늘 “도망치지 말고 부딪혀라”, “한 우물만 파라”라는 말을 듣고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저는 도망쳐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단,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 돌아와야 한다는 것. 둘째, 뭐라도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 그러면 그건 시간 낭비가 아니라, 내 삶과 일을 확장시키는 파격이자 무기가 되는 거죠.
장 : 그래서 그 책이 저는 광고 기획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광고나 창작 안 하는 저 같은 사람들이 읽으면서 인생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상식의 길이 막혔을 때, 몰상식해 보일지라도 딴짓으로 회피해 보고, 그 경험을 다시 삶으로 가져와 ‘납득’시키는 과정은 인생에도 좀 필요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송 : 정확해요. 정해진 트랙을 벗어나면 큰일 날 것 같잖아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고요.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어도, 전리품 정도는 있잖아요. 이 인터뷰가 회피형 동지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나 면죄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웃음)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