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여러분은 ‘질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취업 면접? 혹은 “먹고 갈 건가요, 포장해 가실 건가요?”라고 묻는 매장의 직원? 아니면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 풋풋한 연인들이 주고받는 설레는 대화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질문’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이미지가 참 각양각색입니다. 질문은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에 불과하지만, 의도와 형식에 따라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재앙이 되기도 하고, 삶의 필수 요소가 되기도 하는 ‘불’과도 같다고 할까요? 누군가에게 가슴을 후벼파는 공격적인 상처가 될 수도, 한 사람을 살리는 아주 따스한 연결이 될 수도 있는 질문. 그 질문이 가진 힘을 믿는 사람, 그리고 그 힘을 통해 전문가가 아닌 보통의 일상을 사는 우리들도 서로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사람. ‘라이프쉐어’, ‘이너시티’라는 브랜드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연결하는 최재원 님을 모셨습니다.
오프더모먼트
< 최재원 (웰니스 프로듀서) >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최재원(이하 최) : 반갑습니다. 대화카드인 라이프쉐어, 웰니스 공간인 이너시티를 만든 최재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감정적 연결이 일어날 수 있는 장면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요. 스스로를 웰니스 프로듀서라고 말하고 싶네요.
장 : ‘웰니스 프로듀서’는 좀 신선한 이름이에요? 이건 스스로 만든 직함이신가요?
최 : 네, 제가 만든 직함이에요. 사실 ‘기획자’라는 말도 좀 모호하고, 크리에이터라 하자니 뭔가 콘텐츠 중심 같고. 저는 콘텐츠보다도 그걸 통해서 일어나는 감정의 움직임, 사람들 사이의 연결에 더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웰니스’라는 개념과 ‘프로듀서’라는 실행자의 의미를 결합해서 소개하게 됐어요. 말하자면, 좋은 사람, 좋은 감각, 좋은 자원을 잘 섞어서 장면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장 : 그러고 보니 맨 처음 커리어의 시작점도 기획하는 일, 광고 회사였었죠? 언젠가 이 시기를 일컬어 ‘회색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셨던 게 기억나요.
최 : 맞아요. 대기업 계열 광고 대행사에서 AE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뭔가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환상이 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건 아닌데’ 싶더라고요. 어느 날 출근길에 문득 든 생각이 그거였어요. “나는 지금 안테나를 꺼둔 채, 그냥 몸만 출근하고 있구나.” 말 그대로 회색 인간이 된 기분이었어요. 조직개편이 있었던 시기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했던 선배들이 모두 좌천되는 걸 봤어요. 예초기가 일정 수준 이상의 자란 풀은 예외 없이 잘라버리잖아요. 선배들은 연봉도 높고 연차도 쌓인 잘려나가는 풀이었고, 저는 아직 덜 자라서 예초기 칼날에 닿지 않았던 거예요. 오히려 더 좋은 부서로 발령이 났지요. 그런데 저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랄까요. 그리고 내 미래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오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잘나가는 회사, 탄탄한 연봉, 간판이라는 게 있으니까... ‘내가 이걸 놓으면 손해 보는 거 아닐까?’ 하며 못 벗어나는 상태였죠.
장 : 그런데 바로 이 회사를 그만두고 웰니스를 시작하신 게 아니라고 알고 있거든요, 음반회사로 이직을 한 번 더 하셨던 걸로 아는데, 그 회색 인간을 벗어나야겠다 느낀 결정적 순간이 있었던 걸까요?
최 : 맞아요.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서 멍하니 TV를 틀었는데, 우연히 어떤 밴드 경연 프로그램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무대 위에 있던 프런트맨이,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어요. 같이 노래방 가고, 음반 얘기하고, 둘 다 음악 좋아했는데 저는 ‘현실’을 선택했고, 그 친구는 자퇴까지 하면서 음악을 택했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그날 무대 위에서 그 친구는 눈이 살아 있었고, 저는 소파에 앉아서 ‘죽은 눈’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었죠. 가슴 안쪽에서 숯덩이 같은 게 타오르는 기분이었어요. 그날 밤 많이 울었어요. 부끄럽고, 슬프고, 답답하고... 너무 복잡했어요.
장 : 그 장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거군요.
최 : 네, 그날 이후로 ‘지금 아니면 진짜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퇴사를 결심하고, 음악 제작사로 이직했어요. 아티스트의 앨범을 기획하고, 곡을 고르고, 콘셉트를 정하고, 제작을 관리하는 ANR(Artists & Repertoire) 역할이었죠.
장 : 현실은 어땠나요?
최 : 굉장히 가혹했어요. 일단 돈이 안 됐어요. 연봉이 거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요. 무엇보다 조직 내 분위기가 이전 직장과는 달랐죠. 제가 나름 광고 회사에서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예산과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더라고요. 제 자신이 완전히 제로에서부터 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고, 거기에 조직문화도 전혀 달라서 당시의 제 눈에는 굉장히 험해 보였다고 할까요? 가족의 반대도 심했는데, 잘못 온 게 아닐까라는 고민을 하던 차에 심지어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신 거예요. 병원비가 급하게 필요했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부업을 시작했어요. 낮엔 회사 다니고, 밤엔 프리랜서로 광고 프로젝트를 따서 작업을 했죠. 전에 다니던 회사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큰 회사에서 하기에는 조금 작아서 거절한 프로젝트들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라면서 농가를 살리는 프로젝트도 하고요, 당시에는 필사적으로 2중 생활을 하고 있었죠.
장 : 그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에어비앤비를 그때 시작하신 건가요?
최 : 맞아요. 라이프쉐어가 탄생한 계기가 에어비앤비였는데요. 부업 삼아 당시 살던 투룸 중 하나를 에어비앤비로 돌리게 됐어요. 2평 남짓한 방이었고, 정말 허름했어요. 천장도 낮고, 벽지는 낡았고, 가구는 거의 없었고요. 창문을 열면 바로 옆 건물이 보이는 곳 있잖아요. 그런데 그냥 꾸밈없이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소개 글을 쓰고, 저렴한 가격에 내놓았는데 1박에 만 오천 원이었어요. 너무 허름했으니까. 그래서 대부분 배낭여행자들이 왔거든요, 그 친구들을 어떻게든 따뜻하게 맞으려고 했는데 저도 당시에 넉넉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하는 수없이 했던 것들이 콘텐츠가 돼버린 거예요. 그리고 입소문을 타고 한국 대표 호스트가 된 거죠.
장 : 어떤 콘텐츠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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