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6
목요일에 자정까지 하는 카페에서 하이볼 마시면서 정진아가 안미옥 시인 시 읽어줬던 거 왜 이렇게 좋은지 자꾸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고 그때도 이상했다. 20년 뒤에도, 30년 뒤에도 그러고 있는 우리라면 좋겠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애인과 통화를 하면서, 내가 기억을 잃어도 너는 잘 될 거라고 응원하게 될 것이란 말을 했다. 그 말이 어떤 뜻인지 나만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그를 생각하면서 허연 시인의 문장을 계속 떠올렸다.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싶다. 언제든 달라질 수 있고, 언제든 저버리고 돌아설 수 있고, 여차 하면 생각도 못한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버리고 싶다. 그런 욕망에 대해 누굴 만나든 얌전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상상력에 대해, 기꺼이 무너지고 다시 태어날 자유에 대해 언제든 꿋꿋하게 말하고 싶다. 대화가 가차없이 어긋나고 있다고 느껴질 때조차.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바라는 대로 사랑받지 못할 때조차. 그런 소망이 선명해지게 되풀이하는 요즘이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리지만…
오늘은 싫어하는 사람이랑 삼십 분이나 산책을 했다. 생각해 보면 싫어하는 사람이랑 산책을 할 일은 살면서 거의 없지 않나. 함께 산책하고 싶다는 욕망은 동반수면의 욕망만큼이나 순수하게 애정어린 욕망이니까. 여하튼 그 사람이 혼자 이십 분 동안 버스를 기다리느니 나랑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도 참 미묘하다. 창경궁로부터 율곡로까지, 무척 좋아하는 거리를 무척 싫은 사람이랑 걷는 일은 처음이었다.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아서 안 되는 것인지 그 삼십 분이 아주 나쁘지도 않았다. 낮에 예인이에게 선물할 책갈피를 하나 사면서 쿠키를 하나 받았었다. 걷다가 거짓말처럼 그 쿠키를, 초코칩이 박힌 통통한 쿠키를 그 사람 먹으라고 줬다. 선선한 바람이 막 부는 돈화문 앞을 지나면서 그 사람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싫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도 많은 경우에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렇게나 위선적이고 유치한 나 자신. 집에 돌아오니 오늘은 벌써 토요일, 영국으로 떠나려면 보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도록 무섭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좋은 사람이라도 되어야 살아질 것 같다.
요즘은 생각이 용량을 조금이라도 초과하면 금세 눈물이 난다. 그동안 정진아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추천받은 채식주의자 꼭 읽고 출국하겠다고 말했는데 결국 다 못 읽고 영국으로 훌쩍 떠나버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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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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