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3
팔월 말일은 돌이켜볼수록 참 좋았다. 교환 앞두고 많이 심란하냐고 묻는 사람과 있어서인지 딱히 심란하지 않았다. 서늘바람 부는 경리단길, 수풀 우거진 창가, 길을 묻는 외국인, 깔루아 밀크와 레드 와인, 이건 좋고 저건 싫다는 수다, 분홍색 편지지, 회나무로 막다른 골목, 민소매 차림의 양예인, 마음과 미움과 믿음에 대한 토로, 훤히 보이는 남산과 육교 아래서 본 달까지. 못 잊게 좋았다. 예인이가 나더러 괴로운 감정들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편지에 써주었다. 그건 나보다는 예인이에게 해당되지만, 먼 곳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조금이라도 그런 사람이라면 좋겠다.
출국이 코앞이니 김승일 시인의 문장이 자주 생각난다. 당신을 떠나는 건 당신의 흠집 때문이 아니에요. 나는 그냥 어디 가야 하는 사람이고. 당신의 흠집도 엄청나게 먼 어딘가에서는 그저 애처로움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요새는 그런 생각으로 교환학생 생활을 기대하고 있다. 나의, 너의, 우리의 흠집은 먼 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많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못나고 아쉬운 것들은 다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게. 내가 묶어 두었고 또 나를 묶어 두었던 모든 친밀하고 지겨운 생각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 무겁게 여겨온 것에 대해서는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생각해온 것에 대해서 새로이 무겁게 여겨볼 수 있는 생활이기를.
돌이켜보면 이제껏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심을 둔 것에 비해 인종 담론에는 그다지 관심이 기울질 않았다. 인종 문제에 관한 한 한 번도 이방인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당사자성을 실감해 본 적이 없는 탓이겠다. 인종을 근거로 차별받고 배제당하며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건 작지 않은 행운일 텐데… 그런 나는 아마 당분간 ‘동양인 여성’으로서의 나에 대해, 모국어에 대해, 이방인의 삶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러면서 디아스포라 문학에 흥미를 갖게 될 수도 있겠고, 젠더-인종 교차 페미니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수도 있겠고, 번역의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겠다. 내 관심이 어디로 튀든 간에 모쪼록 기대가 된다. 이런 말을 쓰는 이유는 나쁜 일을 나쁘게만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동아시아인 여성이어서 벌어질 이러저러한 일들. 모든 경험이 배움이고 자산이라는 생각으로 지내려 한다. 괴로운 감정들도 어찌저찌 처리해나가며.
예인이에게 준 편지에도 썼지만 며칠 전에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귀한 말을 처음 알게 됐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떠남이 있으면 돌아옴이 있다는 말. 훌쩍 떠나는 처지에 그 말이 적잖이 위로가 된다. 무거운 만남과 헤어짐도 가볍게,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도 무겁게 여기며 지낼 수 있기를. 어떤 말이든 조금은 헛헛한 감이 있어야 위로가 된다는 것이 참 이상하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