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6.
셰필드에서의 마지막 수요일, 천천히 귀국 짐을 싸고 시내로 나갔다. 들어가보지 않았던 건물들도 몇 군데씩 둘러보며 걷다가 발견한 빈티지샵에 오래 입은 청바지를 기부하고 나왔다. 괜히 학생회관에 들러서 셰필드 풍경이 그려진 엽서도 샀다. 정처 없이 걸으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전부 다 새로웠던 지난 9월과도 같은 마음을 가지려고 애썼다. 햇살 아래 분수와 사람들의 여유가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던 시청 앞 피스 가든도 이제는 놀라울 것 없는 풍경이 되어 있는 것이 묘했다. <클레어의 카메라> 대사 하나가 마음에 쿡 박혀서 내내 떠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랜 삶의 반경인 화정이나 종로의 풍경들에 대한 권태로움도 내가 그곳들을 단 한번도 온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겠지.
이제 ( )은 우리를 어쩌지 못할 거야. 괄호 안에 들어갈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비어있는 채로 두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곳에서 얻은 것은 내가 무언가를 어찌 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무언가가 나를 어찌 하지 못한다는 믿음이다. 짐을 다 빼고 처음 왔던 날처럼 텅 빈 하얀 방을 마주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금요일에는 셰필드대에서 만난 소현 언니에게 추천 받았던 카페에 갔다.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가보게 되었다. 피스타치오 빵과 커피를 먹으면서 제아와 수민이에게 줄 편지를 썼다. 셰필드를 먼저 떠나는 나를 위해 하룻밤을 재워주고 엽서에 서프라이즈에 선물에 간식까지 챙겨주고 기차역까지 배웅해준 제아와 수민이… 셋이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앞으로 정말 많이 생각날 것 같다. 한 자리에 모일 수야 있겠지만 객지에서 처음 만나 의지하며 지내듯 밀도 높은 시간들을 보낼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아쉽기만 하다. 저녁 여섯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쉬지 않고 웃고 떠들며 지나간 추억들을 쏟아냈다. 아무리 슬퍼도 사람들 있는 데서 눈물은 안 날 줄 알았는데 헤어질 때 기차역에서 셋 다 눈물을 훔쳤네…
처음 런던에서 셰필드를 가는 기차에서는 누가 캐리어를 훔쳐갈까 1분에 한번씩 짐칸을 돌아보며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이제 남의 짐을 들어 안쪽에 밀어넣고서 내 짐을 쑤셔 넣고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푹 자면서 런던까지 올 만큼의 배짱은 생겼다. 오랜만에 마지막으로 혼자 트라팔가 광장과 소호 거리를 걸었는데도 별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떠나는 일이 아직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캐리어를 정리하고 플랫 메이트 단톡방에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귀국 항공편 체크인을 했지만, 내일도 모레도 이곳에서 자고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오늘 걸은 거리를 내일도 걸을 수 있고 오늘 만난 사람을 내일도 만날 수 있고 오늘 먹은 음식을 내일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안일함으로 저녁 내내 호텔 안에만 있다가 아쉬운 마음에 밤 아홉 시가 넘어 방을 나섰다. 찬 바람을 맞으면서 워털루 브릿지를 걷고 작은 기념품을 샀다. 짧은 대화를 나눈 기념품샵 직원이 내게 See you soon 이라고 인사했다. 호텔 바로 옆의 타파스 바에서 감바스와 와인 한 잔을 먹고 열한 시가 다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세 시간 뒤면 호텔을 나서 공항으로 향한다. 눈앞의 모든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정말 이상한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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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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