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명쾌함을 유보하는 일기

I'm glad those days are gone for good

2024.01.26 | 조회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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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4.1.22.

 

1.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누군가의 불행을 근거로 나의 행운을 확인받기도 했다. 

 

2. 안전, 위생, 안정감과 맞바꾸고 있을 거대한 부자유함에 대해 최대한 모른 척 해야 한다. 단지 내가 돌아갈 곳이 한국이기 때문에. 차마 ’살기 좋다‘ 라고는 못하고 ’그래도 살기 좋다‘ 라고만 말할 수 있을 이 나라. 내내 잊고 지내기에는 너무 오래 정 들었고 그리워하기에는 너무나 지긋지긋한 내 나라.

 

3. Open door, open books, open mind, open heart.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벽면에 쓰여 있던 것.

 

4. 자유로운 방식으로 애정을 느끼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읽히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나로서 사랑받고 싶다.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는 진심과 한국에 있는 당신이 그립다는 진심은 상충하지 않는다. 베를린의 미술관에서도 셰필드의 길거리에서도 세비야의 성당에서도 당신과 나를 알아간다.

 

5.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항공기 탄소 배출이고 나는 다섯 달 동안 비행기를 열 여덟 번 탔다!…

 

6. 소비자 정체성 말고 다른 돌파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죽이지 않고 소비하지 않고 망가뜨리지 않고 나를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 (여기에 어떤 문장이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7. 만남도 쉽고 말 걸기도 쉽고 키스도 쉽고 취하기도 쉽고 연애도 쉽고 이별도 쉽고 웬만한 건 다 쉬워 보이는 사람들. 마초이즘과 주체적 섹시 문화와 성 자유주의에 동반되는 야만적이고 때로 무례한 인간들의 저질스러움이 싫다. 근데 독점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헤테로 연애 문화와 기성 세대의 성 엄숙주의에 동반되는 관음증적이고 권위적이며 착취적인 한국 가부장 사회의 저질스러움이 더 싫다. 으악

 

8. 다르게, 과도하게, 처절하게 빠져들어야 한다. 차이를 만드는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우리 선희 이선균 애드립처럼… 끝까지 파고 가고 파고 가야 된다. 라고 미켈란젤로 선생님이 말없이 가르쳐주셨다... 

 

9. 각주 없이 말하고 싶다. 삶은 형벌이 아니라고. 그러나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어서 이런 한가한 말은 넣어둔다. 망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돌아갈 곳 없는 이들에게, 삶은 형벌이 아니라고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다만 길고 긴 사연을 짊어진 한 줄의 노랫말처럼 나는 내 삶의 사건들을 짧고 정확하게 요약해버리고 싶다. (내가 누리는 좋음의 대부분을 우연이 구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너무 좋은 순간도 너무 나쁜 순간도 쉽게 관통해버려서, 내일의 행운과 불운을 기다리느라 어제의 것을 돌아볼 시간 같은 것은 없어졌으면 싶다.

 

10. 아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마음으로, 환자를 실은 구급차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마음으로, 외국인의 어눌한 말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받은 모든 다정과 양해를 간직하고 살며 이방인에게 친절할 것. 또 이방인을 대하듯 낯선 나 자신을 살갑게 반길 것.

 

11. 무언가를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그것을 떠나보아야 한다. 물건이든 장소든 사람이든. 반대로 무언가를 제대로 미워하기 위해서 역시 한번쯤 그것을 떠나보아야 한다.

 

12. 조악한 기념품을 파는 흑인 청년 뒤로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백인 할아버지가 걸어가는 거리의 풍경을 동양인 여성 관광객인 내가 가만히 바라본다. 우리들의 인생이 그토록 달라진 것이 필연적이면 얼마나 필연적이겠나. 생의 열쇠는 대개 우연이 쥐고 있다.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든 힘 빠진다고 여기든 나는 우연의 힘을 너무 많이 목격했다. 인종, 국적, 젠더, 직업, 경제력, 장애 여부, 연령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다. 어리숙한 체도 성숙한 체도 가능했던 나의 적당한 젊음, 뭣 모르는 무지함과 잃을 것 없는 빈곤함이 허락해준 씩씩함, 12개국 31개 도시를 발 닿는대로 쏘다니게 해준 비장애의 신체, 어느 것 하나 내 의지로 얻은 것이 없다. 필연의 힘을 조금이나마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아닌 구조에 관한 이야기다. 우연의 어마어마한 불합리성을 이길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집단의 힘에 관한…

 

13. 우연과 실수와 오류와 실패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4. 얼마나 좋은 순간이었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좋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영원히 머무를 수 없으니 마음 놓고 후회 없게 사랑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감히 이민자들, 망명자들, 믿는 구석 없이 무기한으로 떠나온 사람들과 같은 마음일 수 없었던 이유. 타지에서 투쟁하듯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아득함과 막막함을 느껴본 적 없는 내가 얼마나 순진하고 감상적인 마음가짐으로 이곳에 머물렀는지 안다. 돌아가야 할 내 나라가 얼마나 각박하고 지겨운 곳이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잘 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축복임을 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썼듯 ‘안다’는 것과 그것을 ‘견딜 수 있다’는 별개의 문제이기에 자꾸만 흔들리기도 한다.

 

15.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한강 <흰> 중에서

 

16. 조각나 있는 생각들을 모아 붙이면 어떤 형태가 될까. 공원에서, 성당에서, 호숫가에서, 도서관에서, 설산에서, 해변에서, 내 방에서 찾아온 찰나의 감상과 단상들이 궁극적으로 말해주고 싶은 건 무엇일까. 귀국이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작은 것들은 선명한데 큰 것은 내게 여전히 희미하고 어렵고 멀다. 명쾌하게 다듬기를 유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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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유

    0
    10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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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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