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로 살기로 한 날
혹시 이런 경험이 있나요?
회의 시간에 질문이 생겼는데, 손을 들려다가 멈칫합니다. "이거 물어봐도 되나? 다들 아는 건데 나만 모르는 건가?" 결국 질문은 속으로 삼킵니다.
이질성이 보이면 제거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질문도, 감정도 속으로 삼키면서 조직에 적응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답게 살라"고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나는 사자인데, 사람들은 나를 토끼로 봐
저는 늘 스스로를 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도적으로 나서고, 방향을 제시하고, 일을 이끌어가는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제게 토끼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 너는 왜 꼭 사자여야 하니?
- 꼭 주도권을 잡아야 속이 시원해?
- 왜 그렇게 나서려고 해?
그 질문들 앞에서 주저앉곤 했습니다. "내가 사자인 게 잘못일까? 왜 나는 이렇게 나서려고만 할까?" 존재적 의문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감추며 사는 시간들
나를 억누르고 조직의 기대에 맞추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회의 시간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꾹 참습니다. "괜히 나댄다고 할까 봐."
프로젝트가 방향을 잃고 헤맵니다. 내가 개입하면 정리될 것 같은데, 그냥 둡니다. "튀면 안 돼."
동료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스스로 감춥니다. "주제넘는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렇게 시간이 흐릅니다. 성과는 떨어지고, 관계는 어색해지고, 나 자신은 소모됩니다.
나답지 못함은 결국 성과, 관계, 정체성 세 가지 모두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
그러다 "강점 생태계"라는 곳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만났습니다.
"사자로 사는 게 왜 나빠?"
"너는 원래 사자로 태어난 거 아니야?"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 사자로 살면 사람들이 싫어할까 봐.
- 나댄다고 욕할까 봐.
- 결국 사람들이 떠나면, 나는 생존할 수 없을 거라는 무수한 두려움.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지 한 번 실험해볼래?"
강점 생태계는 갤럽 CliftonStrengths를 바탕으로, 각자의 타고난 재능을 발견하고 실험하는 곳입니다. 사회에 너무 적응하려고 애쓰다가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나는 원래 어떤 모양이었지?"를 함께 탐구합니다.
생태계의 단 하나의 규칙
이곳에서 안 되는 건 딱 하나입니다.
"너는 왜 사자가 아니야?"라고 강요하는 것.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앞장서서 방향을 제시하는 게 자연스러웠고, 어떤 사람은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게 강점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잘했습니다.
중요한 건 서로의 모양을 지워버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각자 타고난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그 재능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쓸 수 있는지 함께 실험합니다.
돌이켜보니 나를 억누르고 산 시간들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정한 '정상'에 나를 맞추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릅니다. 나를 바꾸려 하지 않고, 나의 모양이 빛날 수 있는 환경을 찾습니다. 사자는 사자로 살 때 가장 강하고, 토끼는 토끼로 살 때 가장 자유롭습니다.
사자의 걸음으로
사자에게는 사자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로는 두려움을 불러옵니다. 사람들이 떠날까 봐. 혼자 남겨질까 봐. 생존할 수 없을까 봐.
그런데 그 두려움을 한 번 넘어서자,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묻지 않습니다. "내가 사자인 게 왜 문제인가?"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자의 걸음으로 나아갑니다."
첫 걸음은 작을 수 있습니다. 강점검사를 받아보거나, 내 재능이 무엇인지 탐구해보는 것. 혹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 그 작은 실험이 당신의 모양을 발견하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모양으로 태어났나요? 그 모양으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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