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화가-칼 블로흐(Carl Heinrich Bloch)

나의 세계를 두드리는 너의 노크

2024.04.15 | 조회 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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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까뮤

그림과 글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시간

칼 블로흐 <Girl Knocking on Fisherman's Window, 1884>

길 위에서 꾸는 꿈

길 위에 선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에 머무는 자는 길을 갈망한다.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는 닻을 끌어올린 채 돛을 활짝 펴고 광활한 바다로 나아가는 이를 동경하고 정처 없이 바다를 떠다니는 배에 올라탄 이는 바오밥 나무처럼 땅속 깊이 두 발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삶을 염원한다. 닿을 듯 닿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갈증은 언제나 창문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속삭임이 되고, 용기를 내 꽉 닫힌 창문을 열어보라는 부추김이 된다.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

나의 세계는 평온하다. 자그마한 돛단배가 만들어낸 잔물결이 내 마음을 뒤흔들기도 하지만 나는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위에서도 별일 없다는 듯 물결을 따라 출렁이는 부표처럼 그럭저럭 균형을 잡고 살아간다.

하지만 한없이 평온한 나의 세계는 무겁다. 나의 세계를 지탱하려면 가파른 언덕 위로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일상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야 한다. 나의 평온한 세계에 균열이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창문을 닫아거는 걸쇠가 되고 대문을 걸어 잠그는 빗장이 된다. 어쩌면 내가 있는 세계의 평온은 한때 뜨겁게 끓어올랐던 꿈, 창을 열어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싶은 욕망,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그 너머로 발을 내딛고 싶은 갈망을 모두 저 땅 아래 깊은 동굴에 감춰둔 끝에 얻어낸 얄팍한 평화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나의 세계 밖에는 너의 세계가 있다. 무엇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나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너의 세계. 나는 그 세계가 궁금하지만 창문을 열어 밖을 둘러보거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다. 내게 너는 그저 너의 세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일 뿐 나의 세계를 너와 나눌 마음은 없다.      

 

나의 세계를 두드리는 너의 노크

똑. 똑. 똑.

침잠하듯 가라앉아 소리 없이 숨 쉬는 나의 세계를 깨우는 소리. 너는 그저 옅은 미소를 띤 채 손끝으로 가볍게 창문을 두드리지만 그 소리는 내 마음을 흔든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간 나의 눈에 옅은 미소가 매달린 너의 입꼬리와 호기심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너의 두 눈망울이 들어온다. 나의 세계에 너를 들일 마음이, 너의 세계로 넘어갈 마음이 없었지만 나는 너의 노크가 두렵지 않다. 나도 모르게 오랫동안 너의 노크를 기다려왔나 보다.

너의 세계로 넘어와도 괜찮다고, 결국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는 하나라고 속삭이는 너의 눈빛이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창문을 열어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섞인 따뜻한 바람으로 가슴을 채우고 대문에 걸린 빗장을 조용히 치운다.

하지만 내 어깨에 올라앉은 삶의 무게는 쉬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나는 대문 밖으로 발을 내딛고 싶지만 납덩이로 만들어진 무거운 족쇄가 발목에 채워진 듯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대문 안에 서서 족쇄를 끊어내고 밖으로 나가려고 힘겹게 발버둥을 치지만 너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염려가 마음 한쪽에 여전히 남아 있다. 너는 안다. 내 마음을 여전히 어지럽히는 고뇌와 망설임을. 그런 나를 너는 가만히 기다린다.

너의 세계에 조용히 서서, 허우적대며 좀처럼 발을 내밀지 못하는 나를 지켜보던 너는 마침내 빗장이 풀린 대문을 더욱더 거세게 열어붙이고 나의 세계로 발을 들인다. 너는 내게 손을 내밀며 그 손을 잡고 함께 밖으로 나가자고 속삭인다. 너의 손을 잡자 아무리 애를 써도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족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의 세계를 떠받치는 커다란 기둥에 묶여 있던 굵은 사슬과 억겁의 시간을 들여 자르고 또 흠집을 내도 다 풀리지 않을 만큼 겹겹이 쌓여 있었던 족쇄가 마침내 스르르 풀렸다. 너의 노크가, 너의 손을 잡으려는 나의 용기가, 족쇄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너는 마침내 내 손을 꼭 잡고 너의 세계로 나를 데리고 간다.

너의 세계는 길 위에 있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걷는 날도, 허름한 나룻배를 타고 넓은 강을 건너는 날도, 나무 밑에서 간신히 비를 피하며 쪼그려 앉은 채 잠을 청해야 하는 날도 있겠지만 너의 세계는 아름답다. 그 어떤 고통과 불편도 너의 세계를 더럽히지 못한다. 싱그러운 꽃내음과 따스한 봄바람도, 뜨거운 태양과 끝없이 펼쳐진 사막도, 흩날리는 낙엽과 혹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날카로운 바람도, 차가운 겨울 공기와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눈송이도 모두 사랑스럽다.

길 위에 선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에 머무는 자는 길을 갈망한다. 집을 떠나 너의 손을 잡고 걷는 하루하루가 이토록 벅차다면 한없이 평온했던 나의 세계를 이따금 그리워하며 끝없이 네가 이끄는 대로 흔들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글쓴이-김현정

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꿈은 내 글을 쓰는 김작가. 남의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말을 잘 꿰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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