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파울리-아침식사 시간

이름을 찾는 그녀를 위해

2024.05.23 | 조회 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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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까뮤

그림과 글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시간

한나 파울리(Hanna Pauli)-아침식사 시간(Breakfast Time, Frukostdags), 87 x 91cm, 유화, 1887
한나 파울리(Hanna Pauli)-아침식사 시간(Breakfast Time, Frukostdags), 87 x 91cm, 유화, 1887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는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너의 이름은

1887년의 파리, 아름다운 어느 정원의 나무 그늘에 부르주아 가정의 식탁을 그대로 자연으로 옮겨놓은 듯한 아침 식사 테이블이 준비돼 있다. 테이블의 주인은 쏟아지는 햇빛이 사람들의 얼굴을 성가시게 간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녹음이 짙은 곳에 자리를 마련했겠지만, 하늘을 겹겹이 가리는 싱그러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온 눈치 없는 햇살이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린다.      

뜨겁게 유혹하는 햇빛의 손짓이 생명력을 불어넣기라도 한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식기와 값비싼 도자기가 놓인 여유로운 아침 식사 테이블을 그린 이는 스웨덴의 여류 화가 한나 파울리다. 애당초 남자가 인간의 기준이자 표준이라고 여겨지는 탓에 ‘남류 화가’라는 말은 없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냥 화가’가 아닌 ‘여류 화가’로 분류되는 그녀. 우리가 한나 파울리로 알고 있는 그녀가 파리 유학 시절에 그린 <아침식사 시간>의 왼쪽 아래 귀퉁이에는 뜻밖에도 한나 히르슈(Hanna Hirsch)라는 낯선 이름이 새겨져 있다.

 

히르슈도 파울리도 아닌

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아버지 에이브러햄 히르슈(Abraham Hirsch)의 성을 물려받아 23년 동안 히르슈의 이름으로 살았던 그녀는 1887년 가을에 파울리가 됐다. 스톡홀름에 그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날 만큼 성공한 화가로 꼽히는 한나 파울리지만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던 스웨덴 출신의 동료 화가 게오르그 파울리(Georg Pauli)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녀 역시 사회의 요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사위에게 딸의 손을 넘겨주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감당했던 돌봄과 보호의 책임을 사위에게 넘기겠다는 약속인 동시에 자신의 성을 거둬들이는 대신 딸의 이름 옆에 사위의 성을 붙여도 좋다는 허락이다. 파울리가 돼 남편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녀는 지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드문드문 미술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세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데 시간을 할애하느라 히르슈였을 때만큼 재능을 펼치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마음껏 공부하고 그렸던 히르슈의 삶도, 히르슈가 못지않게 부유한 파울리가의 남편을 만나 다복한 가정을 꾸리며 지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파울리의 삶도 모두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달라진 그녀의 이름을 보며 그 속에서 불안과 불평의 기색을 찾아내려는 나의 서투른 탐정 놀이야말로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불평분자의 시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의 동료 화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인정받은 작품에 히르슈라는 이름을 새겨넣은 지 몇 달 만에 파울리가 되어버린 그녀를 보며 그녀가 원한 것이 히르슈인지 파울리인지 궁금해졌다.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시인 김춘수는 한국에서 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그의 대표작 ‘꽃’에서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했다. 누군가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의 중요성을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잘못된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불리는 사람의 본질이 단박에 달라지고 그의 정체성이 순식간에 뒤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히르슈라고 불리는 사람은 세상이 기대하는 히르슈의 삶에 자신도 모르는 새 스며들게 되고 파울리라고 불리는 사람은 점차 파울리다운 모습을 자신의 참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나 파울리가 애정을 담아 그렸던 파리 어느 정원에서의 아침 식사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오드리 헵번이 꿈꿨던 아침과 묘하게 닮았다. 얼핏 보면, 평온하기 그지없는 파리의 푸르르고 빛나는 아침과 하루의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뉴욕의 고요한 새벽 사이에는 어떤 접점도 없어 보인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예술의 꿈을 펼쳤던 한나 파울리가 그린 아침은 호사스럽고 여유롭기 그지없었지만 문 닫힌 보석 가게 앞에서 크루아상을 한입 베어 문 다음 아슬아슬하게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들이켠 커피가 전부인 오드리 헵번의 아침은 초라하고 쓸쓸했다.      

하지만 망막에 맺힌 이미지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 두 사람을 잇는 ‘꿈과 자아 찾기’라는 가느다랗지만 견고한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다. 한나 파울리는 미술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난 파리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국립 미술교육 기관이 아닌 사설 교육기관에서 공부해야만 했지만 영롱하고 찬란한 아침 식사 테이블을 그리며 예술을 향한 꿈을 발산했다. 영화 속의 오드리 헵번은 발을 선뜻 들여놓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지만 가난한 연인이 들고 간 장난감 반지에도 이름을 새겨줄 만큼 따뜻하고 친절한 보석 가게 앞에 서서 좀 더 나은 삶을 갈망했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은 뭇남자들에게 웃음을 팔며 살아가는 홀리 고라이틀리도, 궁핍한 삶을 견디다 못해 고작 열네 살의 나이에 아이가 넷이나 있는 늙은 홀아비와 결혼한 룰라 매이도 아니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여정은 멈추지 않았다. 오드리 헵번의 외침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을지언정 <아침식사 시간>의 한 귀퉁이에 남겨진 ‘한나 히르슈’라는 이름에서도 꿈과 자아를 찾기 위한 여성들의 분투가 엿보인다.      

 

* 글쓴이-김현정

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꿈은 내 글을 쓰는 김작가. 남의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말을 잘 꿰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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