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내게 속삭이는 말
공원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여자와 남자가 있다. 남자를 향한 여자의 눈빛은 다정하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틀림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맞잡고 있다. 그림 한가운데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두 사람이 주인공일 테고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제는 사랑하는 남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첫눈에 든다.
다시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면, 좀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두꺼운 외투의 옷깃을 여민 남자의 차림새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있는 여자의 장갑 낀 양손을 보면 계절은 겨울이 틀림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바라보면 그림 속의 남녀가 틀림없이 서로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일 것이라는 확신이 조금 옅어진다. 남자와 여자가 손을 맞잡고 있긴 하지만 여자의 오른손은 남자의 손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다시 한번 단단하게 붙들고 있다. 여자의 눈빛은 진심 어린 열정과 갈망으로 가득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확신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남자의 몸은 여자를 향해 살짝 기운 듯하지만 그림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의 시선이 정작 어디로 향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네 번, 다섯 번 그림을 보면 더 헷갈린다. 어두컴컴한 배경색을 보면 새벽일 수도 있고, 비가 내려 하늘이 잔뜩 찌푸린 탓에 온종일 어두컴컴한 날의 이른 오후일 수도 있고,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겨울 오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원 담장 너머로 여러 대의 마차와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리 이른 아침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갓 비가 내린 공원 바닥을 표현한 화가의 붓 자국을 보다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에서 보았던 일렁이는 물결이 떠오르자 어쩌면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프랑스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추리도 시작됐다. 그러다, 지나치게 단정한 옷차림과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모습을 한 남자의 차림새에 눈길이 가자 배경은 영국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경이 영국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자 전쟁으로 세상이 무너져도 일상을 꿋꿋하게 지켜나가야 한다며 독일의 런던 공습으로 무너져 내린 런던의 건물 잔해 위에 앉아 차를 마시던 영국 여인의 사진이 퍼뜩 떠올랐다. 어두컴컴한 배경이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상징하고 공원을 거니는 두 남녀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영국인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지레짐작했다.
틀에 맞춰진 시선
그림 앞에 선 내 생각은 이리저리 복잡하게 흔들렸다.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거칠 것이 없다. 그저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중에는 화가가 들었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군!” 하고 무릎을 '탁' 칠만한 감상도 있을 테고, “어떻게 이 그림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며 분노에 찬 말을 내뱉을 만한 감상도 있을 테다.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물론 세상에 내어놓지 않고 작가가 홀로 품는 예술 작품에는 정답이 있을 수도 있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결정에는 자신과는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단 세상에 공개된 작품은 글이 됐건 음악이 됐건 그림이 됐건 많은 사람의 눈과 귀로 낱낱이 파헤쳐져 다양한 해석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작품 제목이나 작가 이름 같은 정보가 공개되면 작품을 보는 이의 해석이 좁아진다. 제목 속에 담긴 의미나 작가의 특징, 성향 등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가두는 틀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에덴동산>이라고 번역되는 이 작품, <The Garden of Eden>을 그린 이는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영국 화가 휴 골드윈 리비에르다. 이 작가의 신상을 아는 것만으로도 내가 펼쳤던 상상의 폭은 대거 좁아지고 수많은 가능성이 제외된다.
먼저, 이 작가는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작가이니 그림 한가운데 선 남녀가 주인공인 것은 맞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서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힌트는 제목에서 찾을 수 있다. 태초에 하느님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를 살게 하신 에덴동산, 그 낙원에 선 두 남녀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 거지?’, 혹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맞기는 할까?’라는 의심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 그림이 그려진 때가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도 전인 1901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전쟁의 폐허 위에서 차를 마시는 여인에 관한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날 것 그대로의 시선과 해석, 그 어디쯤 선 감상
정보를 알기 전에 바라보는 그림과 그 후에 바라본 그림은 다를 수밖에 없다.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바라보는 시선과 멋대로 뻗어나간 생각의 가지를 반듯하게 잘라내고 다듬은 후에 정해진 틀에 맞춰 바라보는 시선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휴 골드윈 리비에르의 <The Garden of Eden>에 관한 정보는 당연해 보이는 것들 너머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내려던 강박적인 노력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도 괜찮은 그림이 있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 글쓴이 - 김현정
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꿈은 내 글을 쓰는 김작가. 남의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말을 잘 꿰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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