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묘호 조, 종, 군의 차이와 구분 기준은 무엇일까

2023.09.23 | 조회 2.3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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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플.사연

주 1회, 당신의 일상에 역사문화 한 스푼🥄 |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선조들의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을 연결 해 드릴게요😉

오늘은 간단한 일화를 곁들여서 조선 왕의 묘호 조와 종의 차이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계유정난, 그리고 양위를 가장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이 일어나고 단종을 지지했던 일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세조가 된 수양대군 아래서 또 본인들의 삶을 살아간 다수의 사람들 로 쪼개진 사실은 조선 전기사의 매우 중요한 분기점으로 유명합니다.

 

왜 분기점이냐고요?

왕통이 바뀌었으니까요.

그것도 중종이나 인조의 사례처럼 반정도 아니고, ‘찬탈’로요.

 

현대인인 우리의 입장에서 볼때 

왕통이 바뀐 거 별로 중요하지 않아보여요. 

어쨌든 살아남는게 중요하지.

 

 

그런데 제가 조선과 그 사상을 공부할수록 

왕통이 바뀌는 문제는 이게 단순히 이때가 "왕조시대" 여서가 아니라 애초 유학을 이념으로 해서 세워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이건 나라가 뒤집어지는 일이고 "매우 중요한 국가 문제" 맞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그밑에 후손들은 유전적으로 다 이성계 후손이니까 라던가

어차피 문종이나 수양대군이나 세종의 아들들이고 핏줄인데 문종의 아들 단종이 왕일 수도 있지만 능력이 안 되면 

(물론 단종이 무능력했다는 근거도 '딱히'는 없음)

숙부인 수양대군이 잇는게 뭐가 문제냐 라고 하는데..... 

 

왕통이란 핏줄, DNA와 같은 어떤 생물학적인 유전이 문제가 아니라 "제사"와 "예"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유학에서 이것은 굉장히 커요.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태조 이성계와 선조의 거리보다 세조와 선조의 거리가 더 가깝고요,

선조와 영정조의 거리보다 인조와 영정조의 거리가 더 가까운 거죠.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유전적인 혈통을 따지자면 조선 왕족은 모두 태조의 유전적 후손은 맞죠.

그런데 왕통으로 따지면 태조랑 선조는 남이고, 선조와 영정조는 남이라는 겁니다. 

 

조선사 공부하면서 맨날 사람들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조선왕들의 조.종 기준 있죠,

왜 누구는 조로 끝나고 누구는 종으로 끝나는지?

그게 왜 그렇게 중요했게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왕통을 따지는 근거였거든요.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중 인종 명종 

선조(중종의 방계 자손으로 사실상 세조의 왕통과 연관있는 마지막 자손) 광해군

인조(선조의 방계 자손이자 조선 후기의 왕통 시작) 효종 현종 숙종 영조(원래 영종)

정조(원래 정종, 그런데 고종이 올림) 순조 헌종 철종 고종(황제) 순종(황제) 

 

 

원래 조는 오로지 국가를 창업한 "태조"에게만 붙이는 겁니다.

그리고 종 이라는 묘호가 조 보다 못한 것도 아니에요. 

이후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폭정을 해서 폐위를 당하지 않는 이상 왕으로서 빛나는 업적을 남기면 '종'을 부여 받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세조에서 깨졌지요.

왕위 찬탈을 한 수양대군과 그를 왕으로 옹립한 세력들은 그의 찬탈이 마치 태조가 조선을 세운 업적에 필적한다고 명분을 세웠고, 

계유정난은 새 왕조의 시작과 마찬가지라고 보고 싶었기 때문에 (예종의 뜻도 그러했고) "세조"를 붙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태조와 세조의 왕통은 달라지게 됐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이후로 자세히 보면 광해군의 입장에서 왜 선조는 선조가 되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이 보이고,

마찬가지로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조가 붙게 되었는지 더 이해가 되실 겁니다.

세조의 선례가 생겨서 후대의 왕들 모두 자신들이 태조에 필적할 "강한 왕" 으로서의 이미지를 갖거나 자신의 뿌리에게 주고 싶어 '조'를 남용해서 부여한 것이지요.

 

 

여담으로 똑같이 반정을 했는데 중종은 왜 조가 안 붙었냐고요?

인조는 본인이 반정을 스스로 일으켰지만,

중종은 가만히 있는데 반정군이 찾아와서 왕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중종의 아들 인종은 중종이 반정을 했으므로 "조"에 해당하는 묘호를 올려야하지 않냐는 분위기에 딱 잘라서 "선왕의 묘호는 중종이면 됐다." 라고 했다는 웃픈 일화가 전해집니다.

 

어쨌든 이렇게 쓰니 이제 좀 눈에 다르게 보이시나요?

태정태세문단세 가 아니라 

태정태세문단

이겁니다.

 

혈통으로는 같은 핏줄 아래에 있지만 

왕통으로는 태조의 자손과 세조의 자손은 다르고

세조의 자손과 선조의 자손은 다르고

선조의 자손과 인조의 자손은 다르다는 겁니다.

 

종묘 정전
종묘 정전

 

종묘 정전에서는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야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윗대(5세인 원조)가 되면 영녕전으로 옮기게 되고 이것을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종묘제사 문제도 이게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터라 

후대로 갈수록 영녕전에 가면 제사를 못받게 되고 영혼은 영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왕들은 모두 정전에 계속 자신들의 신위가 모셔지기를 바랐고 

그 결과 단명하거나 나중에 추존된 왕을 제외하고는 전부 정전에 모시게 되어 정전건축물이 묘-하게 옆으로 길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답니다.

 

여하튼 왕통을 따져야하는 이 모든 까닭은 결국 예와 제사 때문입니다.

 

어찌됐든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의 왕통이 완전히 다르게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조의 자손들이 왕통을 이었을때는 

불가능하던 단종의 복권이 

인조의 왕통을 이은 숙종 때에 가능했던 것은 

숙종의 입장에서 세조는 한 200년 전의 머나먼 유전적 조상이었을 수는 있지만 왕통에 있어서는 남이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세조의 치부를 드러내야하는 것이 알 바 없는 일이고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던 겁니다. 

 

그러나 만약 숙종이 자신의 왕통의 뿌리인 인조의 치부를 드러내야하는 일을 해야한다? 🤔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거고요 

숙종 성격을 보면 감히 언급조차 어려웠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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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쩨리

    0
    5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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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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