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5년 원각사 창건 후 세조가 지은 계문의 실물이 실존했었다?!

2024.01.10 | 조회 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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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플.사연

주 1회, 당신의 일상에 역사문화 한 스푼🥄 |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선조들의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을 연결 해 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2024년 첫 레터로 인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는 12월 중순부터 연휴에 들어가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던 중 덜컥 지독한 감기에 걸려 진짜 보름 가까이 골골대다 정신차리고 글 쓸 힘이 생겨 노트북을 열었답니다.

어째서인지 작년 이맘 때 쯤의 데자뷔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 일까요. 모쪼록 독자님들은 모두 건강 조심 하시길 바랍니다 :) 👨‍⚕️


 

2021년, 역사학계에서는 꽤 여러 발견 이슈의 축복이 있던 해이기도 했지요. 

제가 하필 뉴스레터를 공식적으로 발행 하기로 결심한 게 작년부터 인지라 21년도의 따끈따끈한 이슈들을 제때 언급 못했던 게 아쉬울 정도로 대이슈들이었는데... 타이밍....!!😭

큽! 2024년도에도 흥미로운 핫이슈가 나타나기를 기도 하면서 이번 레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2021년의 이야기를 꺼내느냐 물으신다면 대답 해 드리는게 인지상정이지요.

블로그를 보다보면 연유는 알 수 없지만 회암사 라던가 원각사를 통해 원각사 계문 포스트를 읽으시는 분들이 종종 있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오랜만에 다시 읽었거든요.

그런데 보다보니 제가 좀 다시 보이는 대목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쓰려고 하는데 애초부터 원각사 계문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아무래도 의미가 없잖아요? 

이 얘기를 먼저 써내려가야 빌드업이 맞을 것 같아요.

고로 오늘은 2021년도에 역사학계와 불교계에 도파민을 선사 했던 원각사 계문  이야기를 다시 꺼내볼까 합니다 ☺️ <= 이미 관련 연구논문 한편이 2022년도에 나왔고, 현재 연구 진행하고 계시는 학자님들 계실 겁니다 ㅎㅎㅎ 결과 정말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종로3가에 가면 탑골공원이 있지요.

탑골공원이 탑골공원인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의 국보 2호 (딱히 의미는 없지만)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서있기 때문입니다. 

제게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백탑파 때문에 상당히 의미있는 문화재인데요 ㅎㅎ

그래서 저는 탑골공원을 자주 방문합니다. 

 

- 참 그러고 보니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라고요? 

- 네 원각사지. 

 

절은 사라지고 탑만 현재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이 절이 사라진 건 연산군 때문이죠 ㅎㅎㅎ 

 

아무튼 그런데 15세기 세조대에 세워진 원각사의 낙성(창건) 무렵 세조가 직접 지은 '계문'이 실물로 남아 있었던 것이 발견 된 것이죠.

사실 저도 굉장히 소름이네요.

 

전설인줄 알았는데 전설이 알고보니 사실이었다 이런 느낌이랄까.

탑골공원 NPC인지라 이와 관련된 유물의 실물 출현이라니 되게 다른 의미로 느낌이 다가옵니다.

 


 

원각사는 세조 10년에 세우자는 의논이 나옵니다.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 법회를 베푸니까 현실에서 일어났다고 믿을 수 없는 신이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기이한 상서는 실로 만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흥복사로서 '원각사'라는 이름의 절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근일에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 법회(圓覺法會)를 베푸니, 여래(如來)가 현상(現相)하고 감로(甘露)가 내렸다. 황가사(黃袈娑)의 중[僧] 3인이 탑(塔)을 둘러싸고 정근(精勤)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또 빚이 대낮과 같이 환하였고 채색(彩色)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 분신(舍利分身)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舍利)를 함원전(含元殿)에 공양(供養)하였고, 또 분신(分身)이 수십 매(枚)였다. 이와 같이 기이(奇異)한 상서(祥瑞)는 실로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興福寺)를 세워서 원각사(圓覺寺)로 삼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33권, 세조 10년 5월 2일 갑인 1번째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005002_001

 

그리고 실록에는 원각사를 짓는 내내 굉장히 신이한 기운이 계속 그 터에 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국가 공식 기록이라 허튼 말을 썼을리는 만무한데다 거기에 조선에서 유학자들은 괴력난신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 했는데요....

원각사 짓는 내내 나타났다던 상서로운 기운은 너무 괴력난신이라 솔직히 저는 기록을 보면서도 믿기지는 않지만...

그랬다고 합니다.

 

정신 바짝 차려, 상대는 < 세조실록 > 이야-!

 

 

 그래서 원각사 '계문'이 대체 뭔데?

 

원각사(圓覺寺)가 낙성되었다. 경찬회(慶讚會) 를 베푸니 부회(赴會)한 중[僧]이 1백 28이고, 어정 구결(御定口訣)하고 번역(飜譯)한 《원각수다라료의경(圓覺修多羅了義經)》을 펴 보고, 외호(外護)의 중 2만(萬)을 먹이었다. 이날 원각사(圓覺寺)에 나아갔다.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35권, 세조 11년 4월 7일 계미 2번째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104007_002

 

발견 됐다던 그 '계문(契文)'은 바로 이 낙성식이 열린 당일에 중신들과 원각사에 함께 행차하면서 직접 지어 신하와 승려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실록 기록에는 없는데 '계문' 을 직접 썼군요.

 

그 계문에 대체 어떤 내용이 있었냐고요?

'물과 뭍에 떠도는 망령들을 위로하는 의례인 수륙재(水陸齋)에 함께 참여하자' 고 조정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권하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강희안의 필체에 안견의 그림이라 ㅎㅎㅎ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23519.html | 이미지 출처: 한겨레 제공
강희안의 필체에 안견의 그림이라 ㅎㅎㅎ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23519.html | 이미지 출처: 한겨레 제공

 

사실 저는 이 부분이 진짜 놀랐습니다.

 

그동안 학계에서 세조의 불교 장려와 관련해서 다양한 주장과 관련 논문이 나왔습니다.

세조가 불교에 크게 의탁하게 된 것은 유학의 정통성 말고 불교를 바탕으로 자신의 왕권, 그러니까 왕위의 증명을 보이려 했다 에서부터 세조가 말년에는 자신의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였다 등등

하지만 이게 실증적 증거는 없던 터라 전부 추론이었거든요.

 

그런데 실물 증거가 556년만에 발견이 되다니!

특히나 이 절은 세조가 직접 지은 원찰입니다.

자신의 원찰에서 이런 '수륙재'를 언급한 건 좀 눈여겨볼 포인트입니다.

근데 수륙재를 진짜로 진행했는지 그 여부까지는 일단 제 선에서는 모르겠습니다.

 

 

계문과 관련해서 눈여겨볼 포인트 

 

자기 가오가 있으니 콕집어 자신에게 학살당한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운동의 피해자들,

그리고 단종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퉁쳐서 ''지상에 떠도는 망령들을 위로하는 의례인 수륙재(水陸齋)"를 하자고 권하는 계문을 쓰다니,

저 무렵에는 이미 세조의 피부병도 진행되고 있었고 어떤 이유였든 무언가를 강하게 의탁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세조 본인도 알고 이 계문을 나눠받는 조정 신하들도 사실은 다 알고 있었겠죠.

 

그리고 저는 저기 이름을 쓴 5인 중에 '신숙주' 에 눈이 가는데요,

물론 신숙주가 당대 중신 중 하나라서 대표격인 것도 있지만 그의 말년 시에 소재로 주로 보이는 불교의 '허무와 공사상'이 또 이렇게 연결되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23519.html | 이미지 출처: 한겨례 제공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23519.html | 이미지 출처: 한겨례 제공

 

계문 말미에 있는 이 승불지보(承佛之寶) 란 붉은색 어보도 학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이 어보는 다른 문서에서는 확인 되지 않고 이 계문에서만 보인다는데 그렇다면 세조가 불사 마다 썼던 어보가 다르다는 건데 그 각각의 의미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한 연구 소재로서 흥미돋는 부분이었다지요.

역시나 관련해서 최신 연구 논문이 나왔네요 ㅎㅎㅎ

 

이 계문이 의의가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임금과 왕실이 불교 행사를 직접 후원했다는 기록이 희소한데 이것은 실질적 증거이기 때문에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계문에는 생육신 조려의 아버지였던 조안의 이름이 친필로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계문이 배포될 당시 조안이 받아 소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는데요, 이와 관련해서도 학자들이 연구할 게 늘어나서 학계의 즐거움은 두배라는 군요.

 

저 역시 앞으로 이번에 발견된 희귀급 유물과 관련해서 어떤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올지 기대됩니다.

 

 

제가 뉴스를 접했던 관련기사는 여기 아래에 출처로 남깁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23519.html

 


레퍼런스

 

아 그리고 따끈한 최신 소식으로는 이게 있죠.

2022년 12월 12일자 기사인데,

https://naver.me/53BUCvaQ

원각사 계문은 고문서 섹션에서 경매로 출품됐네요. 추정가 별도 문의였다니 누가 사가셨을지 ㅎㅎㅎ 아무튼 그렇습니다!

 

2022년도에 나온 연구논문 링크도 수록하겠습니다.

흥미 있으시다면 살펴보세요. 😉

1465년 圓覺寺 慶讚會 契文에 대한 고찰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982259342

 

 

빌드업은 여기까지! 

그럼 저는 다음 레터에서 이제 "원각사 계문 속 수륙재"와 관련해서 최근에 떠오른 생각으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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