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출범 당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핵개발 의혹 말소를 위해 취해진 조치들이 추진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때 아사 상태에 빠졌으나, 극적으로 회생하는 과정을 거쳐 갔다. 그러한 조치들은 서울의 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고 대덕으로 이전하여 핵연료개발공단과 통폐합함과 동시에 연구소의 명칭에서 원자력이란 표현을 말소하여 한국에너지연구소로 하고, 원자력안전센터를 출범시키는 조치들이었다.
통폐합이 추진되었던 1980년도의 두 기관의 출연예산은 한국원자력연구소가 69억 원,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 54억 원 수준이었으나, 대부분이 시설비였기 때문에 연구비의 절대부족 문제를 안고 있었고 특히 핵연료 개발공단은 충격 때문에 폐허가 된 상태였다. 쓸 만한 시설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프랑스와 차관사업으로 추진된 핵연료 정련변환시설이 준공되었는데, 이 시설은 가동을 안 하고 가만히 두면 가동에 사용하는 질산 때문에 고철이 된다. 녹슬지 않게 최소한으로 가동하려면 일년에 최소 1천만원이 필요했으나, 원자력연구소는 앞서 말했던 정치적 이유 때문에 1천만원의 예산조차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분소로서 명맥을 이어가던 대덕연구센터 소장은 막 부임한 한필순 박사였는데, 할 수 없이 그는 근무했던 국방과학연구소를 찾아가 당시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서정욱 박사와 부소장 홍판기 박사에게 지원해줄것을 부탁했다. 그 대신, 한필순 박사는 미국에서도 개발 중이었던 열화우라늄(Depleted Uranium)을 사용하는 날개안정분리철갑탄(APFSDS탄)을 개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5,000만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열화우라늄탄 개발을 시작했는데, 놀랄 정도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열화우라늄의 외피에 텅스텐 피복을 입히자 관통자가 부스러지지 않고 성공적으로 전차를 관통한 것이다. 이 사업이 결과적으로 대덕분소를 살렸고, 정련변환시설이 녹스는 것도 그 돈으로 방지했다. 이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중수용핵연료 국산화에도 성공하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많은 성과를 내었고, 한필순 소장은 특히 전력생산용 원자력기술 자립의 중요성과 그것을 위한 연구시설의 추가 확보의 필요성을 관련부처에 역설하여, 시설과 부지확보를 위한 많은 예산을 확보한 덕분에 80년대 말 까지는 연구소의 연간 예산이 2천억 원 규모로 대폭 증액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열화우라늄 관통자 연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신고 후 미국과의 협의 하에 진행되었으며, 제작한 관통자는 1987년 미국과 협의 하에 연구를 종결하고 파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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