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과 지중해를 경계짓는 지브롤터 해협, 북쪽으론 스페인을, 남쪽으론 모로코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이 아름다운 해협에 의미심장한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지브롤터 해협의 뱃사람들에겐 이미 유명한 존재들이죠. 그림자들은 지브롤터 해협 요트에 아무도 모르게 다가가 배의 선미부분을 공격하고는 바닷속 심연으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지난 3년동안 이들이 건드린 배가 이미 500척이 넘습니다.
네, 그림자의 주인공은 바로 범고래입니다.
검은 몸에 하얀 점, 둥글게 생긴 입과 눈, (한 때 유행했던 나이키 신발을 연상시키는) 귀여운 외모의 범고래는 사실 바닷속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다른 바닷속 동물들에 비해 빠른 속도에 더불어 높은 지능을 가진 데다가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두뇌와 스피드를 모두 겸비한 엘리트 킬러 집단인 셈입니다. 바닷속 최상위 포식자 백상아리를 무리지어 함께 사냥하기도 하는 범고래들의 레이더에 낚싯배들과 요트가 들어온 것이죠.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의 공격들에서 사상자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배가 완파한 경우는 2번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는 배의 일부분 (특히 배의 키, 방향타 부분) 이 고장나는 정도의 피해였다고 하네요.
범고래들은 주로 3-5마리씩 함께 움직이며 배들을 공격해왔다고 하는데요, 배의 밑 부분으로 빠르게 접근해 몸으로 배를 치는 행동을 주로 반복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어린 범고래 개체들이 배를 공격하는 동안 나이 많은 암컷 개체, 엄마나 할머니 범고래는 옆에서 맴돌면서 지켜봤다고 합니다. 마치 이 행동을 가르치는 것 처럼요. 지브롤터 해협의 연구자들은 어떤 범고래와 어떤 범고래가 주로 함께 공격을 하는지 그 관계성을 기록해왔는데요, 관계도가 꼭 그것이 알고싶다나 시사프로그램에 나오는 범죄 조직도 같이 생겼습니다.
엄마 화났다 😠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보이는 공격에 연구자들은 범고래들의 공격이 의도적인 걸지 모른다고 분석했습니다. 그것도 복수를 위해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2020년 공격을 시작한 범고래들 중 글래디스 블랑카라는 범고래가 있습니다. 엄마 개체인 글래디스 블랑카는 초반의 공격에도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자신보다 나이 어린 개체들을 몰고 보트 공격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그런 글래디스 블랑카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글래디스 블랑카가 낚시줄에 얽혀 다친 경험이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자신을 비롯한 다른 범고래들에게 피해를 입힌 배들에게 복수를 목적으로 공격을 한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범고래들에 대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들고, 심지어는 한발짝 나아가서 범고래들의 정의실현(!)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들죠. 배를 뒤집는 범고래들의 이야기는 인터넷상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어 수많은 주옥같은 밈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2023년 S/S 신상 트렌드 ✨
하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범고래들의 행동에 대해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놓습니다. 범고래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고, 범고래들의 행동은 그저 놀이다 라는 의견입니다. 범고래들은 사실 유행에 꽤나 민감한 녀석들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연구자들은 범고래들 사회에서 크게 의미 없는 행동들이 인기를 얻었다가 사그러드는 양상을 여러번 관찰 했습니다. 한때는 범고래들 사이에서 죽은 연어를 머리에 쓰고 다니는 게 핫한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이런 짤로도 돌았었죠.
이 외에도 죽은 해파리를 머리에 올리고 다닌다거나, 바다에 떠 있는 바다새들을 놀래키는 것들이 유행처럼 번지곤 했다고 합니다. 여름 핫템 연어모자처럼 지나가는 배를 공격하는 것도 이번 한 철 유행하는 스포츠라는 게 연구자들의 생각입니다.
몇몇 연구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범고래들의 행동을 “복수"처럼 인간적인 감정으로 해석하는 데 우려의 목소리를 냅니다. 범고래들이 복수심을 가진 존재, 혹은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범고래들에 대한 적대적인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지금만 해도 범고래들을 쫓아내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거나 심지어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요.
우리는 어쩔수 없이 인간의 마음으로 동물들을 이해하며 살아가죠. 동물들의 행동과 행동에 담긴 이유를 우리는 아마 앞으로도 잘 모르고 살아갈 겁니다. 동물들의 행동에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부여해서 이해하는 것, 아니면 순수하게 행동학적으로만 해석하는 것, 둘 중에 동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정답은 없겠지만 이번 범고래편을 쓰면서 동물들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동물들을 얼마나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번 편을 다 쓰고 이런 저런 몇가지 후속 조사를 하던 차에 최근에는 비슷한 행동이 3000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스코틀랜드 근처 바다에서도 목격됐다는 최신 기사들이 있더라고요. 범고래들의 행동에 담긴 동기가 어느 쪽이던 이 행동이 번지고 있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복수 혹은 짖궂은 장난, 구독자님은 범고래들의 행동이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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