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지내고 있지?
멀리 있지만 마음이 멀지 않아서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나는 지금 발리 비자를 한 달 더 연장하고, 싱가폴에 갔다가, 다시 발리로 돌아왔다가, 45일간 베트남을 여행할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버렸거든.
이곳에 있으면서 나는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모든 말을 현재형으로 해. 그래서인지 그 무엇보다 성실히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아. 허공에 둥둥 뜬 발을 가지고서, 나의 과거와 미래를 가볍게 초월해버리는 현실을 멍하니 살고 있어.
애인은 베트남 사람이고, 미국에서 10년간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어. 19살에 떠나서 맨몸으로 사업을 시작했대. 해외에도 금수저, 은수저 같은 표현이 있는 거 알아? 여기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인 튜바는 우리나라의 금수저라는 표현이, 자기 나라에는 "너는 태어날 때부터 금발머리가 엉덩이까지 닿는구나!" 라는 표현과 같다고 말해주었어. 어느 나라나 변치 않을 것 같은 절대적인 가치를 동경하는 것은 아무래도 똑같나봐. 아무튼 그렇게 치면 이 애는 금수저도 은수저도 아닌 우드 찹스틱을 잡고 태어나 깡패처럼 미국에서 살아남은 놈이다. 지금은 미국과 베트남에 여러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고,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고 있어.
호스텔에서 그 애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정말이지 이 애가 깡패 새끼인 줄 알았다. 양 팔에 가득한 커다란 타투들, 아침부터 뻑뻑 피워대는 줄담배, 어떤 옷이든 가슴까지 셔츠를 느슨히 풀어헤치는 버릇. 왓더퍽! 오 마이 퍼킹 갓! 아돈기버쉿, 같은 말들을 입에 달고 살고, 미국인스러운 액팅과 언제나 등을 기대거나 짝다리를 짚는 버릇 같은 것... 한 손에는 늘 커피 한 잔을 들고, 일할 때 짜증스럽게 머리를 넘기는 모습. 그러나 늘 어떤 선은 넘지 못하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내게 그런 모습은 정말이지 자유를 느끼게 되더라.
나는 그의 자신감의 원천이 정말이지 궁금해. 크지 않은 키에 날렵한 신체를 가진 아시안 남성인 그가 커다란 몸을 가진 서양인들 사이에서 늘 주인공이 되어 농담을 내뱉을 때, 나는 농담이라는 것이 얼마나 섹시한 것인지, 얼마나 좌중을 압도하고 분위기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유머러스한 사람을 항상 동경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감과 기세, 그리고 누적된, 슬픔을 승화하는 힘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그와 있으면 사람들이 항상 웃어. 왜인지 저 애랑 친해지면 이 호스텔 생활이 재밌겠는걸? 생각하는 순간, 그 애가 나를 해변에 데려갔어.

그를 설명하기에 깡패스럽다는 단어보다 정확한 말이 있을까 싶어. 그를 만난 이후부터 깡패스럽다라는 말은 내게 최고의 칭찬이 되었다. 이 말이 어쩌다 튀어나온 것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애를 보고 있으면 딱히 머리를 굴리지 않더라도 불현듯 이 말이 튀어나왔어. 이 깡패 새끼.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세상의 소음 때문에 내 말이 뭉그러져 들릴 것만 같을 때, 그를 끌어안고 내 안에 고여있던 말들을 있는 힘껏 쏟아냈다. 깡패 새끼. 나는 이런 너가 참 좋아.
깡패, 라는 단어를 소리내 외칠 때면, 된소리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강한 물리적 타격감과 동시에 모국어에 오롯이 스며있는 문화적 맥락과 기억들이 속수무책으로 쏟아진다. 그 모든 총합이 깡패구나 싶어서 꿋꿋하게 Thug나 Gangster 대신 '깡패'라는 단어를 고집해. “이 사랑스러운 깡패야." 애정 어린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은 나는 '야하다, 섭섭하다, 착잡하다, 호방하다, 호쾌하다'라는, 영어와 1:1 대응이 될 수 없는 단어들을 모국어로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도 이 깡패라는 단어의 질감과 뉘앙스를, 기미와 어조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아쉽다.
한편 이 말은 모든 과거와 미래를 원경으로 미뤄두고 오직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언어 같기도 해. 그는 그의 모든 말들을 행동으로서 증명한다. 너 뭐하고 있니? 라는 네 물음에 "삶을 다시 돌아보고 있어." "미래를 걱정하는 것에 시간을 보내고 있어." 답하면, 너는 "인생 짧아. 그러니 고민도 짧게 해. 할 일이 끝나면 불러." 라며 툭 던지듯 대수롭지 않게 외치고는 부웅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버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왜인지 나는 나를 압도하는 현재를 얼얼하게 감각할 뿐이야.

그는 삶을 곁눈질하지 않아.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맞붙어보고 본다. 오른쪽으로 삶이 가격하면 왼쪽이 아닌 오른쪽 아래로 피한다는 본인만의 철학을 가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일단 거리로 나가. 틀린 길이면 돌아가면 되니까. 나는 틀릴까봐 엉거주춤할 때 그는 말해. 저스트 고우 아웃. 풋 다운 유어 폰. 룩 앳 투더 스카이. 그런 뒤에 해변에 깔아둔 타올에 양 팔꿈치를 툭 내려놓고 느슨하게 기대어 하늘을 본다.
그의 영어는 그의 말로 말하자면 no good 이지만, 그 누구보다 확신에 차 있어서 빠그라진 문법으로 말해도 정답 같아. 그래서 그에게 영어를 배운다. 어쩌면 나는 언어가 아닌 태도를 배우고 싶은지도 몰라. 나는 그를 동경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 상태로 아주 많은 시간 그의 언어를 곱씹고 느끼고 관찰하다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그가 아무리 재밌는 사람이어도, 베트남 사람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를 따라 해변에 가는 일도 없었을 거야. 처음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오토바이를 배워서 다음 발리 여행에는 혼자 운전을 해야지, 라는 음흉한 심보로 따라나섰으니까. 그만한 적격자가 없었다. 암 비엣나미스! 그 말만큼 도로 위의 사람을 무작정 신뢰할 수 있는 말은 없다고 생각해. 스무살에 첫 배낭여행으로 50L 백팩을 꽉꽉 채워 떠난 베트남 종주. 그곳에서 나는 도로 위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의 대담함과 무질서 속의 질서에 완벽하게 매료되었다. 그런데 프롬 하노이라고? 내가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태어날 때부터 혼돈으로 가득한 거리에서, 일단 운전대를 잡고 달려본 사람들이 자연스레 체득한 삶의 철학들을 나는 그를 보면서 발견해. 그는 핸들을 먼저 잡은 뒤, 일단 거리로 나선 뒤에야 지도에 목적지를 찾아달라며 요청한다. 서핑을 할 때면 한 세트가 끝나지 않아도 패들질을 하며 맹렬하게 부서지는 화이트 워시를 뚫고 나가. 그는 살면서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대담해.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면, 그를 만나기 전의 내 인생이 너무나도 시시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대범함의 범주를 단숨에 넘어서는 사람인 거야.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그의 언어는 심플하다. 그래서 때론 그를 비웃으며 외치기도 해. 너의 잉글리시는 Poor 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너의 표현들을 한달음에 나열할 수도 있어. 퍽, 투머치, 스튜핏, 쏘 위어드, 리디큘러스, 오마이갓 크레이지 우먼, 오케이 레츠고, 유 슈어? 유 슈어? 유 데프널리 슈어? 암 오케이, 암 옥게이, 암 옥게~이. 이 단어들만 있으면 아마도 그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쓰는 언어는 그가 생존을 위해 얼마나 둔탁하게 세상을 감각하려고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흔적 같아.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함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너는 곧잘 눈물을 흘리곤 했으니까. 그런 그가 쓰는 언어가 이리도 뭉그러져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생존하기에 급급했던 그의 지난 날을 조심스럽게 짐작할 뿐이다.

그는 오케이라는 단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더운 나라에서 자라 한국인인 나보다 훨씬 추위를 많이 타는 그는 한 시간 동안 캄캄한 밤길을 드라이브하며 차가운 공기에 벌벌 떨다 괜찮냐는 말에 이렇게 말한다. 암 오케이. 암 비엣나미스~~
투자하고 있던 회사가 파산하여 하루만에 몇 억을 잃은 날엔 단어의 중간을 길게 늘리며 발음한다. 암 옥게~~~이. 괜찮지 않다는 뜻이다.
혼자인 상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너를 떠날 채비를 했던 날, 너의 오케이는 끝음이 점차 잦아드는 오케이였다. 암 오ㄱㅔ...ㅇ
그리고 난 그 여러 층위의 오케이를 잊지 못해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고나서부터 나는 여러 개의 성조가 있는 언어가 얼마나 섹시하고 아름다운지를 느끼기 시작했다. 베트남어가 중국어보다 성조가 2개가 많은 6개라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어. 광둥어는 성조가 9개라며 자기가 들어본 언어 중에 가장 섹시했다고 너는 말해주었지.
사실 예전에는 성조가 있는 언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늘 누군가 화나 있는 것 같았고, 대화의 속도는 숨 돌릴 틈 없이 빠르니, 대화라기보단 충돌에 가까운 리듬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동남아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편견이 작용했는지도 몰라. 오래된 한국 영화 속에서 그들은 대개 위협적이거나 거칠고, 가난한 외노자이거나 혹은 이름조차 또렷이 불리지 않는 브로커 역할로 등장하곤 했으니까. 그렇게 반복된 이미지들이 쌓이면서, 나는 언어를 듣기 전에 이미 그것을 둘러싼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얄팍한 밑천을 드러내는 말이지만 그래서 나는 당연스럽게 그가 나보다 가난할 줄 알았어. 그는 원래 한국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한국이 동남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게 몸에 배어서래. 그렇지만 베트남엔 누군가를 싫어하면 훗날 반드시 사랑하게 된다는 말 역시도 있다고 했지.

나는 그렇지 않다고 과신했지만 나 역시 뼛속 깊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 그래서 같이 해변에 갔다가 그가 신혼여행을 하는 부부들이 갈 법한 근사한 레스토랑에 나를 데려갔을 때 크게 놀랐다. 왜 이렇게 비싼 곳에 왔지?
알다시피 나는 팬시한 레스토랑에서 하는 식사를 그닥 즐기진 않아. 왜인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움츠러드는 몸을 모른 척하며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향해 손을 뻗었어. 고기가 이미 잘려있길래 한입에 우와앙 넣었는데, 그는 그 조그마한 조각을 자신의 접시로 가져가서 고급스럽게 한 번 더 썰어먹는 거 있지. 그 순간 계급 차이를 느껴버리고 말았다.... 친구들은 내가 시크릿가든 같은 드라마 속에 있는 것 같대. 왜인지 빈곤하고 꾸밈없으며 말괄량이 같은 여자주인공... 뭔지 알지.

그는 내가 많은 영화와 책을 읽고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해. 내가 한강을 소개시켜주었더니 하루만에 채식주의자를 독파해오고 이런 말을 했지.
그녀에게는 (한강에게는) 꿈이 있대. 이걸 읽은 사람들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꿈.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어갔어.
"있지. 너랑 나랑 지금 이 노을을 보고 있지만 돌아가면 몽땅 잊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은 다음부터는 나는 원래도 자연과 동물을 사랑했지만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바쁘기 시작했어. 그리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몇 번이고 펼쳐보고 싶어지지. 너는 한국 사회의 문화나 정치적인 면만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몰라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의 언어에는 이걸 읽은 사람이 그동안 보던 같은 것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야. 너가 나한테 더 많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알려주었으면 좋겠어. 너가 영어를 더 잘하게 되면 함께 이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어."

그동안 나는 누군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어. 그래서 둔탁하고 흐리멍덩한 생각을 촘촘하게 언어화하고 구조화할 수 있도록, 더 정교하게 다듬어내는 것에 최선을 다해 왔지. 하지만 지금은 필립 로스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생각해본 뒤에 다시 오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와 나에게는 언어라는 커다란 장벽이 있어. 그는 절반은 미국인이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지만, 나는 몇 번이고 하고 싶은 말들을 참고 참다가 묻지 않고 상상으로 공백을 채워. 정교하게 다듬어진 언어로 확신을 얻지는 못하지만 그가 나에게 하는 행동으로 나를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욕망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어제는 너 또 커피마시니? 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유 커피 리핏? (repeat), 리핏 더 커피? 리필 커피? 라고 하는 것을 그가 "아, 커피 어게인?" 하면서 알아들었고, 브링(Bring) 마이 백팩이라는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서 백팩... 컴 히어? 라고 말을 하다가 놀림을 받기도 했어. 그런 날에는 그가 꼭 헛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해. "땡큐 폴 유아 잉글리쉬." 긴 이야기는 번역기를 켜서 그에게 보여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서로를 잘 알게 되고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기만 해.
나중에 한국에 가면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고 싶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시간이 나면 이야기를 해줘.
발리에서 구식 캠코더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첨부할게.
Take care.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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