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go, It's okay."

블랙 위도우 (2021)

2022.03.27 | 조회 92 | 0 |

소박한 영화감상문

매주 토요일 영화리뷰 연재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낡고 불쾌한 말을 '맏딸'들이 직접 가져와 자조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K-장녀'라는 표현이 있다. 여행을 다니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부모님 없이 혼자서만 좋은 경험을 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성실히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압박을 느끼고, '엄마'가 없으면 당연히 '엄마 대신'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하고, 사랑만 받고 철이 없어야 할 어린 나이부터 조숙하게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희생'하기를 요구받는 게 이들 'K-장녀'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는 바로 'M-장녀'로 호명되기에 제격인 인물이 아닌가. 그는 캡틴아메리카나 아이언맨, 토르 등 같은 원년 어벤져스들이 자신만의 시리즈를 세 편이나 갖는 동안 한 편의 무비도 배정받지 못했고,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mcu 굿즈들 중에서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아 팬들이 #whereisblackwidow 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기도 했다. 영화 밖에서는 히어로로서가 아니라 다른 남성 히어로들의 연애 상대로 관심을 받고, 심지어 동료 배우들에게 'slut'이나 'whore' 같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러한 푸대접을 묵묵히 견디던 블랙 위도우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호크아이를 대신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정말이지 장녀스러운 엔딩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같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희생한 아이언맨의 장례식은 영화의 피날레로 조명받은 반면, 블랙 위도우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 제대로 추모되지 못했다.

영화 <블랙 위도우>는 이러한 온갖 서러움을 안고 시작한다. '로키' '완다비전'처럼 영화 속에서 죽은 다른 인물들은 콘텐츠로 제작될 때 평행세계 같은 장치를 사용한 반면,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가 죽는 결말을 건드리지 않고 해당 세계관 내에서 작품을 완성하기를 선택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영화는 프리퀄의 형식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속 블랙 위도우라는 히어로의 공백을 파고들며, 비어있던 서사를 메꾸는 동시에 기존의 서사들에 설득력과 당위까지 더해준다.

이 영화는 너무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서 지금이기에 더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정신적 세뇌를 넘어 이제는 화학적 세뇌를 당해 본인들이 자타에 모두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위도우들을, 탈출한 위도우들은 스스로를 내던지면서까지 구해내려 한다.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세뇌,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그들의 연대를 그려냄으로써,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슬프고 안타깝기만 했던 나타샤의 헌신이 <블랙 위도우>에서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경험을 통해 비로소 관객들은 훗날 예정된 나타샤의 희생 또한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블랙 위도우의 액션씬은 쾌락적이지만 그보다 절박하다. 다른 히어로 영화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위태로움과 절박함이 블랙 위도우에게서 유독 느껴지는 것은, 감독이 '실제로 길거리에서 공격 당하는 여성들'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과도 이어진다. <블랙 위도우>는 착취와 폭력을 극복하는 과정, 동시에 다른 피해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구하려 하는 과정을 다룬다. 과거에 저질렀던 죄들을 삶과 몸을 바쳐 속죄하고자 하는 나타샤의 서사를 비춘다. 선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비추는 영화들을 나는 아낀다. 악한 인물에게 매력과 사연을 덧씌우기보다, 착하게 사는 착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술 작품이 많아지기를 늘 바란다.

블랙 위도우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팬들에게, 나의 최고의 영웅 블랙 위도우에게, 오랫동안 나타샤 로마노프를 연기했고 영화 <블랙 위도우>의 기획에도 참여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에게, <블랙 위도우>는 늦었지만 도착했다. 이제 바톤을 넘겨받은 옐레나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나타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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