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 낮은 곳으로 임하시며

세자매 (2020)

2022.02.26 | 조회 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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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영화감상문

매주 토요일 영화리뷰 연재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4:1)

영화 <세자매>를 이끄는 둘째 미연과, 영화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그려진다. 종교에 의지하고 헌신하는 여성 신자와, 겉으로는 성실한 종교인이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중적인 남성 종교인의 모습은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현실반영을 넘어, 기독교는 영화 전반에서 배경과 상징으로 작동한다. 미연이 섬기는 신은 낮은 자를 돌보는 신이다. 그 신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크리스마스에 교회를 기웃거려본 사람이라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 같은 표현도 들어봤을 법 하다. 혹자는 '여전히 어딘가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누군가는 굶어죽고 약자들은 혐오와 차별 속에 사는데 그 신은 뭘 하냐'고 묻고, 세간의 인식에서 그 신은 낮은 자들을 현혹하고 높은 자들을 배불리는 신일 수도 있지만, 분명 성경에서 그 신은 낮은 자를 구원하고(욥5:11),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신24), 약한 자를 택하는(고전1:27) 신이다.

그러나 <세 자매>에서 낮은 곳을 향해서는 신의 임재 대신 폭력이 흐른다. 세 자매의 부친은 아내를 때리고, '바깥에서 데려온' 자식인 희숙과 준섭을 때린다. 어린 미연과 미옥이 맨발에 내복바람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하자 어른들은 아이들의 안전보다 가부장의 권위 편을 들며 그들을 돌려보낸다. 세 자매에게는 그러한 폭력이 몸에, 영혼에, 삶에 어려 있다. 가정폭력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첫째 희숙은 숨쉬듯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희숙을 연기한 김선영 배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날 안 싫어할까?"라는 대사가 연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고 밝혔다. 희숙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역사는 유년기 부친으로부터 성인이 되자 남편으로 이어졌다. 가끔씩 찾아와 폭언을 하는 남편에게 희숙은 내내 멋쩍게 웃다가 돈봉투를 내민다. 그는 상대방이 화를 내거나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늘 눈치를 보느라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으로 보인다.

둘째 미연은 다른 자매들과 달리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밝고 깨끗한 미연의 아파트 역시 희숙과 미옥의 어둑한 집과 대비된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가 교회라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가정을 꾸리고 교회에 봉사하는 독실한 집사를 연기하는 것이, 살아남기 위해 미연이 택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감사할 상황이 아닌데 자꾸 감사기도를 하고, 화를 내야 할 상황인데 화를 내지 않는다. 그렇게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은 왜곡된 형태로 배출된다. 남편의 외도 상대인 교회 청년 '효정'과의 관계는 미연이라는 인물을 관객에게 설명해준다. 미연을 연기한 문소리 배우가 '둘 다 절규하듯 연기했다'고 밝힌 기도회 신에서, 미연은 남편과 효정의 외도를 목격한 상태로 기도회에서 효정의 손을 잡고 울며 기도한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자고 있는 효정을 조용히 깨워 폭행하고 협박한다. 그 관계의 긴장감은 교회 공연에서 절정에 달한다. 미연의 폭행으로 얼굴에 멍이 든 효정이 솔로 파트를 부르고, 효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지휘하는 미연의 표정은 압도적이다.

셋째인 미옥은 실패한 예술가의 전형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희숙은 억눌려서 병이 났고, 미연은 어딘가 비틀린 사람이 되었다면 미옥은 어떻게든 몸에 어린 폭력을 바깥으로 꺼내 없애려고 애를 쓴다. 실패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주변인들에게 고함을 치고 폭력을 쓰는 미옥의 모습을 보면, 그가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려다가 실패했다는 걸 추측해볼 수 있다. 가정폭력의 영향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갖게 된 알콜중독자 예술가라는 캐릭터는 분명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흔한 특성이 남성이 아닌 여성 인물에게 부여되었다는 점과 장윤주라는 배우의 신선한 에너지로 마냥 뻔하지는 않게 느껴진다. 장윤주 배우는 미옥이 수돗가에서 울다가 뛰어나가는 모습에서 그 인물의 희망을 봤다고 표현했다. 묵혀왔던 감정을 분출하고, 그래도 살아보려는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세 자매에게 어려 있는 폭력과 불행은 그들을 양육자로 두고 있는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진다. 미연이 가족끼리 둘러앉은 식사 자리에서 어린 딸 하은에게 식사기도를 강요하는 장면에서, 하은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긴장은 관객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영화 내내 집이 싫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희숙의 사춘기 딸 보미는 엄마의 자해 장면을 목격한다. 자녀가 미성년자일 경우,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부모는 주로 절대적인 권위자가 된다. 부친이 세 자매에게 가했던 폭력은 그들의 몸과 삶에 그대로 남아 그 아래 자식에게까지 흐른다. 수습되지 못한 폭력이, 사라지기보단 증폭되어 더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 이승원 감독은 홍은미 평론가의 표현처럼 '고통을 외형화'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그 시선이 온정적인가 싶다가도, 그들의 고통을 끝끝내 꺼내어 증명하고야 마는 끈질김에 조금 질리고 만다. 피해자의 고통을 이렇게 낱낱이 중계하는 행위는 윤리 이전에 '예술적'이라고는 할 수 있는가.

바다가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그전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마치 쓴 약을 먹은 뒤 입안을 달래는 사탕 같다고 느껴진다. 갈등을 고조하다가 터뜨린 후, <세자매>는 관객에게 최소한의 숨통만 트게 해주고는 그 이후의 몫을 넘긴다.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세 자매의 사진이 영화의 마지막을 닫고, 동시에 익숙하고 의외인 선율과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가수 이소라가 부른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요'다. 115분에 걸쳐 영화가 가정폭력을 처절하게 증명해내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라는 노랫말을 듣게 되면 아무래도 당혹스럽다. 이 영화 어디에 사랑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다보면 우리 사회 속 '사랑'이라는 단어로 묵살된 폭력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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