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Gaia]
여신은 어떤 신들보다도 거대했는데, 심지어 제우스보다도 거대했다. 여신은 누운 모습이었는데, 여신의 다리는 자연히 땅과 연결되었고 여신 주위의 땅들은 어떤 그리스 땅보다도 비옥했다.
가이아는 세계의 탄생과 함께였으며 세계 그 자체였다. 우주의 중간에 여신이 있었고, 여신을 둘러싸고 여신의 자매이자 형제인 공허가 있었다. 이름은 바로 카오스[공허].
가이아는 공허로부터 존재를 태동시키고 아울러 세계를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가이아와 공허 사이에서(혹은 공허에서) 밤과 어둠이 태어났다. 그다음 잘 아는 대로 가이아는 차례로 하늘, 산, 바다를 낳았다. 그리고 가이아는 자신의 피조물과 결합하여 지진, 천둥 등의 어마어마한 자연의 힘과, 티탄이라는 거인족을 낳았다. 가이아가 낳은 티탄은 여섯 딸과 여섯 아들, 모두 열 둘이었는데, 티탄은 이후 그리스 신화의 시작점이 된다. 티탄은 너무 거대해서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렸다. 티탄 중 여섯 딸들은 비록 일반적인 그리스 신화에서 정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제우스와 그 이후 세대의 신들을 압도하는 법도와 세계의 법칙을 정리하는 힘을 가졌다.
사랑하지만 분노하고 분노하지만 사랑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이아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서 압도적인 불가해함과 그로 인한 경외를 느낀다.
가이아는 자신의 피조물이자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티탄을 포함한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그런데 우라노스는 자식들의 강력한 힘을 두려워하여 땅에 가두었다. 이에 분노한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자신 사이에서 낳은 아들, 크로노스에게 우라노스를 커다란 낫으로 베라고 명한다. 상처 입은 우라노스의 피에서 역시나 많은 괴물들이 태어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책의 다른 곳에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가이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피조물이자 자손을 해하는데, 우라노스를 대신하여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된 크로노스마저 자신의 형제인 괴물들을 가두자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저주를 내린다. 크로노스 역시 자식들 중 한 명의 손에 왕위를 잃게 되리라는 저주였다. 이후에 잘 알려진 대로,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을 삼키지만 왕비 레아가 가이아의 도움으로 제우스를 빼내 몰래 키운다. 이후 제우스가 크로노스가 삼킨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토해내게 하고 아버지를 왕위에서 물리친다.
하지만 가이아의 분노는 끝나지 않는다. 제우스가 티탄족과의 전쟁, “티타노마키아”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가이아의 자식들을 탄압하고 지하 세계에 가둔 것이다. 이에 가이아는 제우스에게 분노하여, 제우스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거대한 괴물 “기가스”와 “티폰”을 만들어낸다. 이들 모두 상반신은 거인의 몸에 하반신은 뱀의 꼬리를 한 모습인데, 이는 기가스와 티폰 외 여러 괴물들을 묘사한 모습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뱀은 땅의 힘을 상징헀기 때문에, 기가스와 티폰 등의 강력한 괴물들도 대지와 관련한 강력한 힘과 자연력을 의인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티폰의 아내로도 알려진 에키드나 역시 인간의 몸에 뱀의 꼬리를 한 모습인데, 이 에키드나와 에키드나가 티폰 사이에서 낳은 괴물들에 대해서도 책의 뒤에서 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가이아의 일화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녀의 “편을 명확히 가를 수 없는 애정과 분노”이다. 가이아는 자식을 벌하다가도, 자신의 뜻과 달리 탄압 받는 자식들은 구출하려 한다. 또한 우라노스, 크라노스, 제우스에게 그러했듯이 정확한 방향과 편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나는 이 점이야말로 가이아의 매력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가이아의 애정의 방향은 종잡을 수 없다.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들이 가이아에게 직접 대적하지 못한다. 가이아는 어떤 절대적 권위를 만들지 않으며, 모든 힘들을 동등하게 사랑한다. 때문에 왕위를 잡은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의 계보를 고의적으로 공격하기까지 한다. 그들 역시 가아이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가이아는 어떤 고정된 종류의,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절대적인 보호와 제휴를 행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분노하며 모두를 벌하는, 고정된 제도권에서 탈피한 비정형적인 힘을 발휘하며, 바로 이 예측 불가한 비정형성이야말로 내가 신들을 대할 때 가이아에게 가장 두려움을 느끼게 한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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