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과학기술] 블랙홀 바로 옆에서도 생명이 살 수 있다

2021.07.08 | 조회 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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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여우원숭이

매주 월요일, 따끈따끈한 최신 과학기술을 짧고 쉬운 글로 소개합니다.

지구상에 지금처럼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태양 덕분입니다. 물론 지열과 같은 에너지원을 더 상상할 수는 있지만 지구 생태계의 대부분은 태양 빛이 공급해 주는 에너지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지요. 어느 날 갑자기 태양 빛이 사라져 버린다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는 틀림없이 멸종당할 겁니다.

그런데 태양에 가깝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거예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를 직격으로 얻어맞게 되고 지표면의 온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겁니다. 지구 표면이 지금보다 훨씬 뜨거워져서 물이 모두 끓어 증발해버릴 정도가 된다면 물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 같은 생명은 역시 살아남기 어렵겠지요.

그림에서 파란색 띠로 표현된 부분이 거주 가능 구역, '골디락스 존'입니다. 출처: ESO/Henrykus, CC BY 4.0
그림에서 파란색 띠로 표현된 부분이 거주 가능 구역, '골디락스 존'입니다. 출처: ESO/Henrykus, CC BY 4.0

이처럼 항성으로부터 딱 알맞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서 생명이 살기에 적당한 구역을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이라고 부릅니다. 영국 전래동화인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에서 따온 말인데, 주인공 골디락스가 숲속 오두막에서 죽 세 그릇을 발견하고는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게 식어 있지도 않은 적당히 따뜻한 죽 그릇을 골라 먹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지요. (천문학 외의 많은 분야에서도 양극단이 아닌 선택지를 설명할 때 골디락스의 비유를 많이 듭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내용은 모두 '항성 주변의 행성'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블랙홀 주변의 행성'을 상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영화 <인터스텔라>에 몇 개의 행성이 묘사되긴 했었지만 거기에 생명이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분들은 드물 거예요. 블랙홀은 빛을 빨아들이기만 하고 내놓지는 못하니까요. 하지만 2020년 1월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블랙홀 주변에서도 생명이 살아갈 만한 환경이 충분히 조성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블랙홀이 주변에 가하는 '중력'이란 도대체 뭘까요? 흔히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 정도로 이야기되지만, 실제로 질량을 가진 물체는 시공간을 휘어버린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통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력이 아주 강한 물체 주변에서는 질량을 갖지 않는 빛마저도 경로가 휘어지지요. 아인슈타인이 처음 일반상대론을 주장했을 때는 거의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지만, 1919년의 개기일식 당시 태양 뒤편에서 오는 별빛이 정말로 휘어진다는 것이 검증되어서 일반상대론이 받아들여진 바 있습니다.

중력이 빛에 가하는 효과는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질량이 많은 물체 주변에서는 시공간이 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무거운 천체 주변에서는 텅 빈 우주공간에서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이때 무거운 물체에서 출발해서 바깥쪽으로 뻗어나가는 빛은 파장이 길어지지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빨주노초파남보 중에 빨간색 빛이 파장이 제일 길고 에너지가 약한 반면 보라색 빛은 파장이 짧고 에너지가 강합니다. 그래서 무거운 물체 쪽에서 가벼운 쪽으로 이동하는 빛의 파장이 변하는 '적색 편이(redshift)'라고 부르지요. 반대로 무거운 물체로 접근하는 빛은 파장이 짧아지고 에너지가 높아지는 효과가 나겠지요? 이를 '청색 편이(blueshift)'라고 부릅니다. 원래 빨간색이었던 빛도 파란색 빛이 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지요.

왼쪽의 태양처럼 보이는 것은 무거운 별이고, 오른쪽의 파란 점은 가벼운 별입니다. 무거운 쪽에 있을수록 빛이 파장이 길어져 보라색이 되고, 가벼운 쪽에 있을수록 빨간색이 됩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Vlad2i, CC BY-SA 3.0
왼쪽의 태양처럼 보이는 것은 무거운 별이고, 오른쪽의 파란 점은 가벼운 별입니다. 무거운 쪽에 있을수록 빛이 파장이 길어져 보라색이 되고, 가벼운 쪽에 있을수록 빨간색이 됩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Vlad2i, CC BY-SA 3.0

이제 우리가 블랙홀 근처에 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블랙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엄청나게 중력이 강한 천체이지요? 블랙홀에서 우리 방향으로 오는 빛은 굉장한 적색편이를 겪을 테고, 반대로 블랙홀 반대편에서 우리 방향으로 다가오는 빛은 아주 강한 청색편이를 겪을 겁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우주 배경 복사'라고 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우주 배경 복사는 빅뱅의 메아리 같은 현상인데, 우주 어느 방향을 봐도 2.7켈빈(영하 270도) 온도에 해당하는 전파가 다가온다는 의미입니다. 너무나도 에너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런 전파는 아무리 모아 봐도 쓸모 있는 수준의 에너지양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블랙홀이 있습니다. 아주 질량이 큰 블랙홀 주변에서는 아주 강한 수준의 청색편이가 일어날 테고, 질량이 충분히 크다면 영하 270도짜리 전파마저도 식물이 광합성을 하고 우리가 열을 얻을 수 있는 가시광선이나 적외선 영역으로 바꾸어낼 수도 있겠지요. 마치 태양 빛을 렌즈로 모으면 종이를 태울 수 있는 것처럼, 블랙홀의 막강한 중력장이 우주배경복사를 더 강한 빛으로 바꾸어내는 겁니다.

연구진의 계산에 의하면, 태양보다 1억 6천만 배 이상 무거운 블랙홀 주변에서는 우주배경복사를 충분히 청색편이시켜서 지구상에서와 같은 생태계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의 빛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행성에서 살게 된다면 하늘은 아주 장관일 거예요. 하늘의 한편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떠 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래 그림처럼요.

반면, 블랙홀의 반대쪽 하늘을 쳐다보면 아무 천체도 떠 있지 않지만 하늘이 환하게 밝을 거예요. 그쪽에 태양 같은 항성이 떠 있어서 빛을 발산하는 건 아니지만 우주 어디에서나 쏟아지고 있는 우주배경복사가 청색편이 덕분에 가시광선이 되어 있는 거니까, 하늘 전체가 환하게 빛나고 있으면서도 태양이나 달 같은 눈에 띄는 천체는 없는 신기한 광경일 겁니다.

다만, 이런 행성에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갑니다. 중력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데, 이 정도 청색편이를 일으킬 만큼 중력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도 더욱 느리게 흘러갈 테니까요. 블랙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 행성을 관찰하면, 분명 생명이 태어날 만한 환경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데도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서 생명체가 도무지 나타나기는 할지 감감무소식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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