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아카이빙 2호 ㅣ"이런데 살면 누가 속 편해"

금명에게 새집을 구해줄 것도 아니면서 영범이가 이렇게 말했다니까요. 🤷🏻

2025.04.19 | 조회 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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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아카이빙

격주에 한번, 서울의 골목을 탐험합니다🗺️🏘️

'이런 곳'이 대체 뭔데

요즘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다들 보셨나요? 저는 아직 이런저런 이유로 전편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숏츠에서 골목 아카이빙 2호에 쓰고 싶은 장면을 봤습니다.

달동네에 사는 금명에게 연인 영범은 “금명아, 무슨 이런 우범지역.. 너 이런 데서 살면 나 잠도 못 자. 무슨 할렘도 아니고(…), 여기 안돼” 라고 말합니다. 영범은 처음에는 낡은 집과 골목, 수상하게 생긴 금명의 이웃을 보며 이 동네가 위험한 이유를 대는 듯합니다만, 곧 “여자친구가 이런데 살면 누가 속 편해”라 합니다. 선량한 이웃, 마음에 쏙 드는 장소 등 뾰족이 나쁜 점이 없는 이 동네를 ‘이런 데’라며 납작하게 표현해 버리죠.

영범이 말한 ‘이런데’가 뭘까요? 번듯한 아파트가 아닌 곳?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야 하는 고바위 동네? 조금 낡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곳?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

아직도 서울에는 금명이 살던 동네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강남구에 위치한 구룡마을입니다. 이곳에는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 빈부격차의 상징, 타워팰리스와 1.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판자촌, 초품아 기대주(…) 등이요.

보통 무허가주택 집결 지역을 ‘판자촌’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유로 판자촌이 생겼는지 알아보니, 약 100년 전인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고요. 당시 경성 인구가 늘어나며 빈민들이 무허가 주택을 지어 살기 시작한 게 판자촌의 탄생입니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한에 귀환인과 월남민이 대거 유입되며 도시빈민들은 판자촌에 자리 잡을 수 밖에 없었고요. 휴전 직후인 1954년부터 정부는 도시 안에 판잣집의 신축을 금지하고, 50년대 후반부터는 강제 철거를 했습니다.

이후 서울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진행을 위해 ‘도시미관’을 이유로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강제 철거합니다. (1화에서 말씀드린 만덕동 강제 이주와 닮은 처리 방식이죠. 🔗1화 링크)강제 이주를 시켰다면, 공공임대주택이나 대체 주거지를 마련해줬어야 했을 텐데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곳곳에 또 다른 판자촌을 형성해 살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다녀와 봤습니다.

이번 호는 구룡마을에 대해 써보려고 포털에 '구룡마을'을 검색했더니 구룡마을 도시개발사업 설계 공모 당선작이 공개된 참이었는지 관련된 기사가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조감도 사진만 있더라고요. '이제는 정말 사진을 찾기가 어렵구나!'라는 마음이 들어 한달음에 구룡마을로 갔습니다.

구룡마을에 도착한 저는 ‘여기 불 정말 자주 나나 보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구룡마을 초입에는 소방서가 자리 잡고 있었고,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구룡마을 미니 소방서’가 곳곳에 보였거든요. 실제로 판자촌은 화재에 매우 취약합니다. 각 가구가 촘촘히 붙어있기도 하거니와, 판자와 ‘떡솜’이라는 단열재와 스티로폼 등을 덧대어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연탄의 잔불이 옮겨붙거나, 노후 전기선에서 불꽃이 튀면 큰 화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죠. 화재 발생 이후에 소방차가 진입하기에는 도로 사정도 마땅치 않아 초기 진압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2023년에는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화재로 인해 주택 총 60세대가 소실되었고 6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는데요. 이런 크고 작은 화재는 2011년 이후 총 26회가 있었다고 하니 곳곳에 소화기를 비치해 두는 게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다만 예방일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불법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판자촌은 허가받은 건물이 아니기에 '불법은 불법이야'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다만, 저는 판자촌이 만들어진 맥락을 감안한다면 '토지 불법 점유'라고 보기는 어렵다 봅니다. 재개발이 예정되지 않았을 때는 국가가 판자촌 형성을 어느 정도 묵인해 주기도 했고요. 1980년대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다면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판자촌을 해체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이주대책이나 보상, 주민 간의 갈등, 행정 이슈 등을 감당하기엔 당시에만 해도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재개발이 필요해진 지금에서야 불법 점유라던가, 무허가 촌락이라는 명분을 꺼낸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주민에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주소지를 구룡마을로 등록하거나 수도와 전기를 쓸 수도 있는 주민들도 있었는데요. 이를 보았을 때 어느정도 묵인된, 자생적 정착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구룡마을이나 여러 판자촌이 우리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는 법적 권리가 없는 불법 거주지이니 보상은커녕 강제 철거를 할 수 있다는 스탠스를 보이다가도 선거철만 되면 주민들의 생존권이나, 주민 의사를 반영한 재개발을 들먹이니까요. 

 

또다시 집을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갈 수 있나

현재 67%의 주민들은 서울시와 SH공사가 제공한 공공임대주택으로 이주했습니다.(25년 4월 기준) 제가 방문했을 때에도 더 이상 거주하는 것 같지 않은 집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누구든 그 집에 살고 있다면 남겼을 만한 흔적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약 33%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은 추운 겨울을 좀 더 든든히 지내기 위해 현수막 같은 걸 이리저리 덧댄 티가 나기도 하고, 다 쓴 연탄재가 나와 있기도 했어요.

 

서울시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는 임대보증금과 임대료를 전액 지원하고, 그 외 거주민에게는 임대보증금 전액 감면과 임대료 60% 감면을 제공한다고 합니다.(2025년 4월 기준) 제가 방문했을 때도 동네 이곳저곳에 임시이주 신청 안내문이 붙어있었습니다. 구룡마을 거주민이라면 20만 원 미만의 금액으로 거주할 수 있다는데요. 일반적인 서울 시세를 고려하면 좋은 조건이라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고령이라는 점과 지금의 생계 수준으로는 (그마저도)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주민들이 선뜻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주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구룡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 대다수는 강남구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고령인 이들이 이제 와서 먼 거리를 통근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죠.

만약 이들이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판자촌, 빈민가(라고 불리는 곳)로 밀려나게 될 겁니다. 여기서 대책 없이 떠난다면 주거 환경은 더 열악해질 뿐입니다.

 

구룡마을 골목을 걷다가, 둔촌주공에 있었을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둔촌주공은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지금은 철거된 아파트 단지입니다. 지금은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올파포'(올림픽파크 포레온)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저 표지판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과정을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구룡마을 7A지구를 나타내는 데에 쓰이고 있었어요. 미래에 구룡마을도 철거되면 저 표지판은 또 어디에 자리 잡을지 상상해 봤습니다.

 

구룡마을과 판자촌의 역사를 읽으며, 저는 재개발을 더 이상 시장 논리만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정적인 주거권을 위한 주택 공급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시민의 주거권을 빼앗는 방식이라면 누구를 위한 공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법적 관점과 사회적, 인권적 관점이 뒤섞인 재개발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2화를 마무리 짓습니다. 


구독자 님, 오늘도 함께 탐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저의 미숙함으로 틀린 내용이 있거나,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댓글을 부탁드릴게요. 그럼 3화에서 뵙겠습니다! 🗺️

 

걱정하는 독자분들께 덧붙입니다. 모든 사진은 현재 거주 중인 원주민들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촬영했음을 알려드려요. 앞으로도 서울에 마지막 남은 판자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진을 찍거나, 유쾌하지 않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골목 아카이빙을 발행하진 않겠습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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