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나 후암동을 걷다 보면, 뭐에 홀린 듯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골목을 만납니다. 통일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없는 화분(처럼 쓰는 고무대야)이 한 무더기 보이거나, 바퀴가 한쪽 빠진 유아차가 세워져 있기도 하고요. (이건 아마도 어르신이 보행기 대신 쓰고 계신 거겠죠.)
저는 이런 풍경을 보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몇몇 친구들은 ‘이게 뭐가 좋냐’며 유난한 제 취향에 물음표를 남기기도 하지만요. 그건 열심히 살아보려는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이지 않고서는 억지로 만들 수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너무 골목들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런 골목들은 곧 서울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집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오래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남은 골목들이라도 열심히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 역이 가깝고, 지리적 이점이 있어 보이는데 아파트보단 주택이 많아 보이는 동네라면, 높은 확률로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동네죠. 짧으면 3년 만에 없어지고, 길면 10년 이상도 남아는 있겠지만요. 그 집들을 모두 허물고 번듯한 아파트나 근린시설이 들어오면 기억 속의 동네는 아마 몇몇 사진과 로드뷰 정도로만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말에 저는 괜히 발끈하기도 하는데요. 그건 제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집이 재개발 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기억 속의 동네는 몇몇 사진과 로드뷰 정도로만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은… 네… 제 얘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살던 부산의 어느 동네를 가보면, 기억 속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큰 도로의 모양쯤은 남아있을 법한데도 쭉 뻗은 모습의 길과 아파트가 그 자리를 꿰찼더라고요.
이 뉴스레터를 쓰면서 참 오랜만에 예전 동네의 사진을 찾아봤었는데요. 제가 이 동네를 떠난 이후, 원주민들은 꽤 오랜 시간 투쟁을 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조금 더 찾아보니,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는 부산 영도와 초량동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만덕동에 강제 이주시켰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주거 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분이었고요. 40년 뒤인 2010년대 중반에도 같은 명분으로 같은 일이 생겼으니, 원주민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련 기사 🔗링크)
이것이 제가 추억이나 감성, 소위 말하는 ‘힙’으로만 골목을 소비하지 않기로 한 이유입니다.
여느 뉴스레터는 재개발 관련 법이 완화되면 가장 ‘수혜’를 받을 지역은 여기라던가, 재개발이 진행되면 초기 투자금 몇억으로 번듯한 아파트를 사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도 알려줍니다. 다음 재개발 지역은 어디라는 ‘톱 시크릿’을 알려주기도 하고요. 재개발 인가를 받기 전에 미리 매매해야 이득이라나 뭐라나요…
오해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정당건물 안전진단 D나 E등급을 받은 건물처럼 안전하지는 않다고 판단한 건물이나 공공보건 위생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건물은 재건축해야 마땅합니다. 또 밀려드는 수요에 맞춰 적절히 주택을 공급하는 일도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런데, 작금의 재건축은 안전이나 공공보건,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 공급을 1목적으로 삼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Chat GPT에게 “앞으로 몇 년 뒤면 서울에서 재개발 지역이 사라질까? 쪽방촌, 판자촌도” 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해주더라고요. 그런데, 주민 동의율, 사업성 등 여러 변수에 의해 그 시기를 정확히 맞추기는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대충이라도 때려 맞춰(?)보라고 졸랐더니 2030년대 중후반쯤에는 재개발 지역이 거의 사라질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쯤 되면 서울에 빨간 벽돌 단층 주택보다는 번듯한 아파트가 잔뜩 들어설 예정이라네요. 이렇게 멋진 골목을 볼 수 있는 날이 2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참 아쉽습니다. (물론 GPT의 응답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겠죠!)
서론이 좀 길었지만, 앞으로 저는 서울(그리고 여러 도시의)의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골목을 아카이빙할 겁니다. 만약 10년 뒤에 저처럼 서울의 단층 주택, 재개발 구역에 관심이 생긴 누군가가 로드뷰를 더듬기만 하는 일이 없길 바라면서요.🥹 빨간 벽돌 단층 주택이 가진 멋이라던가, 뭐가 있을지 모르는 골목, 그리고 그 골목에서 우릴 기다리는 ‘무엇’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멋진 카페가 될 수도 있겠고요. ‘여기서 담배피는 사람 바보’같이 피식 웃음 나는 낙서를 만날 수 있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중간중간 부동산 정책이나 빈곤, 재개발 지역과 관련한 문제를 다루기도 할 겁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 뉴스레터는 격주에 한 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여러 골목들을 소개하려면 한 주에 한 호씩 발행해도 모자랄 텐데요. ‘몇 가지만 빠르게’ 보다는 ‘모든 걸 오랫동안’이 아카이빙이라는 취지에 잘 맞는 것 같아서요. 어느 골목도 자료가 없이 사라지는 일 없도록 지치지 않고 아카이빙 해보겠습니다. 뭐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살짝 겁이 나기도 하는 골목 탐험 같은 뉴스레터를 만들어 볼게요. 기운차고 씩씩한 마음으로 인사드리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함께 탐험에 나서는 기분으로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2주 뒤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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