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 김화랑의 생생 월드 쏙쏙

제 1회, 끝

2021.12.31 | 조회 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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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음회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몹시도 구태의연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전쟁도 미소도 사랑도 언젠가 끝이 나고, 마냥 영원할 것 같기만 한 1인 2만원 무한리필 소고깃집에도 제한시간이 있다. 끝이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지금 읽고 계신 이 글도 언젠가 끝이 난다.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실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nkburrow, Worcestershire, England
Inkburrow, Worcestershire, England

 

 1978년, 한 부부가 영국 우스터셔 주 잉크베로우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 보금자리 앞마당 귀퉁이에 전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당시 전나무의 크기는 약 183cm(6ft) 정도였다고 한다. 43년이 지난 지금 TV방송국 작가였던 Avril과 남편 Christopher Rowlands 부부는 은퇴한 70대의 노부부가 되었고, 180cm 정도였던 전나무는 15m(50ft)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이자 작은 마을의 상징이 되었다. 15m가 얼마나 커다란 크기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 분도 계실 것이다. 15m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6층 높이 정도 된다. (아파트 높이 비유가 지나치게 한국사람 같아 첨부하자면, 고대 메갈로돈의 크기가 15m, 허블 망원경의 뒤를 잇는 차세대 우주 망원경 렌즈의 직경이 15m 정도 된다. 역시 아파트 높이만큼 쉽게 체감되는 비유는 없는 것 같다.)

 

Avril Rowlands, 75, and her husband Christopher, 76
Avril Rowlands, 75, and her husband Christopher, 76

“나무는 우리 삶의 커다란 부분이 되었고, 크리스마스에 전나무 조명에 불을 밝히는 일이 전통이 되었어요.”

“조명에 불을 밝히면 다들 그때가 올해 크리스마스의 시작이라고 하죠.”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부부는 나무를 장식한다. 조명을 달고 알록달록한 색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고 불을 밝힌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잉크베로우 뿐만 아니라 가깝고 먼 곳에 위치한 마을 사람들, 또 더 멀리서 나무를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로 조용했던 마을 어귀가 북적거린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득한 어딘가의 한 해가 끝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어둠 속에서 폭죽을 터트리고, 미소 짓고, 서로의 눈 속에 비친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 

 

 우선 본격적인 사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랜만에 돌아온 시음회의 첫 주제가 <끝>이라는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그리고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힌다. 이것은 순전히 날씨 탓이다. 연말 때문이고 인생 때문이고, 흔들리는 회전목마가, 사랑이, 노래가, 한 개비 담배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많은 좋은 일들이 그랬고, 나쁘고 슬픈 일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모조리 끝이 있었고 뒷모습이 있었고 사라졌고, 어떤 흔적이 남거나, 기억을 남기거나, 어떤 일들은 끝내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겨울 없는 한 해를 보낸 적이 있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찾아올 그 해 10월말 나는 호주의 멜버른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말에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남반구의 12월말은 완벽한 한여름이다. 게다가 내가 머물던 멜버른은 호주 대륙에서도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얼마나 남쪽이냐 하면 남극해가 그리 멀지 않을 지경이다. 작열하는 남반구의 태양과 평균 33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그 해 나는 반팔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멜버른 남부 모닝턴 해변 근처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다음 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겨울을 맞이할 수 있었다.

 

 겨울 없이 보낸 한 해는 어쩐지 조금 어색했다. 무한히 순환하는 사계절 중 겨울을 끝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확실히 무언가를 빼먹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도통 뭘 잊었는지는 모르겠는 기분. 마치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치룬 적도 없는 기말고사가 끝나 있는 기분. 피곤하고 고된 일도 없지만 그에 따른 보상도 후련함도 없는 기분. 그건 아마 내가 뼛속까지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도관이 얼고 얼굴이 얼고, 얼다 못해 건조해지는 겨울이 오면, 오소소 떨며 훈훈한 국밥집 문 밀고 들어가, 주문한 순댓국이 나오기도 전에 쌈장 듬뿍 찍은 청양고추 안주 삼아 차디찬 소주를 털어 넣는, 그런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춥디추운 한 해의 끝을 보내고 서서히 훈풍이 도는 봄이 와야 뭔가 시작되는 기분이 드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조금 무책임하게 말하자면 끝이라는 건 어쩌면 시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 같다. 구태의연한 이야기다. 어쨌거나 나는 내년 겨울이 오면 잉크베로우의 전나무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영국 시골 조용한 마을 어귀에 찾아와, 커다란 전나무에 걸린 조명을 바라보며 한 해의 마지막을 축하하는 사람들, 한적한 길가에 세워져 있는 다양한 색깔의 자동차들, 폭죽을 들고 소리를 치며 길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내 조금은 안심할 것이다. 아아, 올해도 끝이구나. 그렇지만 끝이 아니구나 하고.

 

the end.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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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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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mien

    1
    almost 3 years 전

    ㄴ 답글
  • 1
    almost 3 years 전

    정말 재밌네요 쏙쏙 !

    ㄴ 답글
  • momo

    1
    almost 3 years 전

    화랑님 덕분에 저 역시 내년 겨울에는 '잉크베로우의 전나무'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오랜 동안 한자리를 지켜낸 나무와 그 나무와 더불어 한해의 끝과 시작을 맞이 했을 부부.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의 끝과 시작을 함께하는 나무야 말로 신의 은총입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으니... 하늘엔 영광, 땅위에 평화. 감사합니다.

    ㄴ 답글
  • 손스타

    1
    almost 3 years 전

    잘보고갑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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