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과 회고와 < 만화 >
어린 시절 나는 일요일마다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내복 바람으로 TV 앞에 공손히 앉아있는 오전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남짓이 지나면 그제서야 가족들과 교회에 갈 준비를 했지. 그때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재밌어했다. 대사가 없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도 열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른이 된 지금의 나는 다소 다른 목적으로 만화를 시청한다.
생활에 지쳤기 때문에 우린 대화가 줄고 일상을 잊기 위해 아무것에나 몰두하고 있다*
도무지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사건들이 머릿속을 헤집는 날에는 잠시 생각하기를 멈춰야 한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 그것은 알기 두렵다는 의미에 가깝다.
나는 아무것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안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만화는 그에 부합한다.
오늘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요즘 어떤 것도 깊게 다가오질 않는다고. 우리는 앞으로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살아가야만 할 텐데 더 이상 예전처럼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열정과 체력이 없다. 인간이란 소모품과 다르지 않아서 계속해서 낡고 병들어 갈 것이고 하루는 점점 짧아지고 잠의 질은 떨어질 것이며 이렇다 할 스캔들 없이 단지 정신없는 하루 일주일 일 년을 보낼 것이다.
휴가만 주어지면 여행을 가거나, 전시를 보고 공연을 보고 아이돌을 좋아하고 특정 영화를 생각하느라 아침이 오던 지난날은 이제 없다.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바뀐 일상 루틴과 모든 환경들 덕에 최대 52시간의 근무시간과 출퇴근 20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일과 중 여가로 보낼 수 있는 건 하루에 단 두세 시간 남짓이다. 헬스를 못 간지 보름이 넘었고 집은 그저 잠자는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절망적인 생활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가능한 애니메이션 시청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만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모두 잔인한 생활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여기서 구원을 찾으리라는 보장은 못 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께 휴식이 필요하다면 이만한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만화 속의 인물은 미성년자 성매매를 하지도 화장실 몰카를 찍지도 늦은 밤 가해를 목적으로 한 스토킹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이 기회를 빌어 신나는 마음으로 구독자 님께 상황과 입맛에 맞는 애니메이션 추천을 하고 싶다.
- 충격받고 싶을 때 : 나루토, 진격의 거인, 강철의 연금술사, 주술 회전, 도쿄 리벤 저스, fate/stay night
- 사람이 죽는 이유를 알고 싶을 때 : 명탐정 코난, 우국의 모리아티, 문호 스트레이독스
- 울고 싶을 때 : 암살 교실, 도로에 도로, 귀멸의 칼날, 괴물 사변
-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 모브 사이코 100, 원펀맨,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 사이키 쿠스 오의 재난, 겁쟁이 페달
- 지쳤을 때 : 호오즈키의 냉철, 나츠메 우인 장
특히 < 문호 스트레이독스 >는 내가 유일하게 여러 번 돌려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추천하고 있다. 낮에는 이능 특무과, 밤에는 포트마피아 그리고 그 사이의 황혼을 지키는 무장탐정사가 서로 맞붙으며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그린 이야기인데, 재밌는 점은 등장인물이 실제 작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인물들의 이능력은 작가가 쓴 책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문스독의 주인공인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이라는 능력을 쓰고 원래의 그처럼 어떠한 여자와 함께 자살하기를 희망하는 캐릭터다. 나는 상대의 능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스스로를 죽이는 일에는 자주 실패하는, 자학이 취미인 다자이에게서 대리만족을 느깰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높이 사고 있다.
2년 전인 2020년 겨울, 나는 문호 스트레이독스의 배경지인 일본의 요코하마 시에 다녀왔다. 친구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기에 그를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려 큰 다리 같은 육교를 올랐다. 그러자 평지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이 저기 있었는데, 작 중 인물들이 좋아하는 크레이프 맛집의 모티프가 된 장소다. 실제로는 쇼핑 센터지만 말이다. 나는 그곳에 가까워지며 애니 속 장면이 실재하는 광경을 목격하며 이 작품에 더욱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붉은 벽돌에 도착했고 그 앞에는 거짓말처럼 간이 아이스링크가 있었다. 친구와 나는 쇼핑센터에서 나름 현지에서 유명하다는 그러나 특별히 맛있지는 않은 오므라이스를 먹고 나와 각자의 발 사이즈에 맞는 스케이트를 집고 아이스링크를 누볐다. 기대 만큼의 스피드는 나지 않았고 발도 무척 불편했지만 그런 점이 현실감을 일깨워 주지는 않았다. 그날의 모든 일들은 전부 이세계 같았다.
내 삶에는 낭만이 필요하다. 가능성이 필요하다. 총알 한두 발에 픽 죽어버리는 시시한 삶은 아주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다. 이것은 공상 속에 살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다른 세계의 존재를 상상하고 그것에 일정 부분 속으면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의 존재에 몰두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럴 수 없다면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삶의 허무함과 권태에 사로잡혀 다자이 오사무처럼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현실감각은 나 같은 부류의 인간에겐 가장 경계해야 할 독이다. 그러니까 생활에 지친 나는 매일 터치 몇 번에 요코하마의 붉은 벽돌 탐정사무소에서 내복 바람으로 공손히 앉아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곡을 골랐다. 바로 나츠메 우인장 1기 엔딩곡인데, 날이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분을 삭이곤 했으니 당신도 한번 들어보면 좋겠다.
🎧 中孝介(아타리 코스케) - 夏夕空(여름 저녁의 하늘)
*최지인, 최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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