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일화가 하나 있다.
엄마와 아빠가 데이트하던 시절. 밥을 먹고 간 호프집에서 500cc 생맥주를 마시던 아버지가 잠들었다는 이야기. 실컷 자고 눈을 떠보니 엄마가 자신의 술잔을 다 비우고, 아빠의 것도 다 마신 채로 잠자코 앉아서 기다렸다는 이야기. 엄마도 술을 못하는 편이어서 동생과 나는 당최 그 말이 믿어지지 않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그 정도로 술을 못하는 인간이며 나는 그의 유전자를고스란히 물려받았으므로 친구들 사이에서 알쓰라 불리게 되었다.
아빠가 술만 드시면 안주 삼는 일화는 또 하나 있는데, 그건 내가 처음 술을 입에 댔을 때. 여섯 살 쯤 되었나. 가족들이 외가에 마주 앉아 놀고 있었고, 포도가 특산물인 지역에 살던 할머니는 여름만 되면 포도주를 담갔다. 술 못하는 아빠가 잠이 안 오는 날이면 마시던 낡은 식탁 위의 싸구려 진로 포도주보다도 더 달콤한 그것. 나는 어른들이 하는 것이라면 죄다 따라 해보고 싶은 나이였고. 맥심 믹스 커피에 에이스 담가 먹기에 이어 술 마시기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리라.
물론 배후는 있었다. 까마득하게 젊디젊었던 삼촌들. 그때 삼촌들은 군대도 가기 전이었으니 소주잔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작은 조카가 얼마나 귀여웠으며, 하필이면 자기들끼리도 그런 장난에 미쳐있었을 치기 어린 시절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는 엄마의 손 뒤로 홀짝. 또 홀짝. 또 홀짝. 그렇게 세 모금을 마신 꼬마는 금세 헤죽이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삼촌들 말에 손뼉을 치면서 웃다가 잠이 들었다. 아기도 술을 마시면 취하는구나, 신이 난 삼촌들 목소리가 귓가에 굴러다닐 무렵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그날 먹은 모든 것을 게웠다. 아직도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
“내가 아파서 토하는 애 토는 닦아봤어도, 술 취한 애 토는 처음 닦아본다. 어휴.”
저만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한숨을 내뱉곤 짓궂은 동생들을 한껏 흘겨보았다.
매운 것이나 홍어 같이 삭힌 음식, 그리고 바싹 구운 전에도 환장하는 식성을 가진 나는 말술일 것 같다는 세간의 추측을 뒤로하고 역시나 이건 뭐 개미만도 못한 주량으로 살아왔다. 커서는 좀 나아지겠지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주사는 왜 하필이면 자는 건지. 술자리가 채 무르익어갈 무렵부터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다음날로 넘어가는 술자리에서만 빛을 발했는데, 대외활동이나 프로젝트를 하던 무렵에서야 겨우 술자리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주사로 진작에 잠이 든 가현이는 언제나 그리 길게 잠들지 못했고. 한 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를 취침한 후에 기상하면 최초로 말짱한 상태로 리셋되어 다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가성비가 좋은 몸이던가. 눈을 떠 술자리로 향하면, 이미 죽을 애들은 죽어있고 ‘찐’이라 불리는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나는 그들과 다시 술을 마시고 수습하고, 뒷정리까지 마친 후 해 뜨는 걸 보면서 얼마 되지도 않는 주량에 감사해 했다. 평생 모를 것 같았던 술로 얻을 수 있는 친목이 무엇인지 느지막이 배웠다.
그리고 소년을 만났다. 국밥에 반주로 소주를 걸치는 게 생활이던 인간. 나 같은 사람과는 겸상도 안 한다는 인간이 어찌하여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퇴근길에 나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작은 캔, 고된 날에는 큰 캔으로다가 물고 빨며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길에 똑딱 그것을 비우고 나면집에서 금세 잠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나는 사회인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 머금은, 조금은 축축하고 또 눅눅한 바람에 청량한 맥주를 축이면 무언가 후련해지는 기분. 그 기분에 도취해서 매일 그랬는지도.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은 기회만 되면 친구 집에 가는 길이라며 나를 데려다 줬고, 그 길마다 맥주를 같이 마셔주었다. 공교롭게도 좋아하는 술이 같아서 우리는 같은 것을 들고 같은 길을 걸었다. 먼 훗날 그가 맥주는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인 걸 알았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었지.
모쪼록 소년을 만나 사람 구실을 하게 될 정도는 되었다. 나와는 달리 두루두루 친구도 많고, 그들과 만나는 자리에는 낮에도 밤에도 대부분 술이함께 했으므로 동석하며 나는 술맛(!?)을 알아갔다. 일할 때 말곤 밤새 술을 마시는 행위를 처음 해봤다. 광란의 새벽. 사람들이 한껏 풀어진 모습으로 어우러지고 망가지면서 논다는 걸, 그리고 그게 내 상상과는 다르게 퍽 재밌는 것이었단 걸. 친구들은 대학에 가자마자 느낀다는 해방감을 나는 너무나도 늦게 알았다. 밤마다 목을 축이며 우리는 사랑을 말하고, 나란히 걸었다. 행복했던 만큼 오붓한 시간은 길지 않았고. 어쩌면 너무 즐겼는 지도 몰라. 아이가 태어났다.
그다지 즐기지도 않았으면서, 즐길 줄도 몰랐으면서 임신을 하고 난 다음에는 어찌나 술이 먹고 싶던지 노래를 불렀다. 왜 그럴까. 진짜 싫은 청개구리 심보인데, 못 먹는다니까 너무 먹고 싶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더욱 심화됐다. 자지 않는 아이를 안고 달래며 눈물 흘리던 밤마다 그렇게 시원한 맥주가 그리웠고, 잠을 좀 자고 싶어질 때마다 역한 냄새를 풍기던 소주 한 잔이 사무쳤다. 그리하여 결국 무알콜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맹비난을 받으며 그 맛없는 걸 먹고 싶니. 먹고 싶어. 나는 애 낳아도 이렇게 오래 술 못 먹을줄 몰랐단 말이야. 수유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단 말야.
당시에는 시중에 팔고 있던 무알콜 맥주는 하이트 제로. 그리고 막 출시된 클라우드 정도였다. 전 세계에서 맛없기로 유명한 한국 맥주라더니, 기대보다도 더 처참한 맛이었다. 그토록 먹고 싶었지만, 이따위 걸 먹고 싶진 않았다. 내가 원하던 게 아니라구 ! 하이트 제로는 배수구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갔다. 안녕. 역시 술꾼들 말은 듣는 게 바르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그런데 말야,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체 왜 무알콜을 입에 대봤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소년과 일본 가서 먹은 컵라면에 맥주 한 모금. 머리에 별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고삐를 풀었다. 오직 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곧 단유를 하게 됐고. 소년 없는 밤에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고 홀로 달래던 밤마다, 그래서 심신이 지칠 때마다 혼자 꺼내어 마셨다. 기껏해야 330ml 작은 캔 하나였지만, 그것이 내게 주었던 커다란 위로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이가 때마다 원더윅스(*아기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일컫는 말로 잘 지내던 아기가 갑자기 짜증이 늘고 울고 보채는 등 양육자를 힘들게 하는 때)에 접어들고, 그 무렵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으로 버티자 소년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술살이 불더라. 고작 그것도 술이라고. 안주도 안 먹는 깡술인데도 무게가 늘었다.
그러다 또, 아이가 찾아왔고.
두번 째 임신에서는 광활한 무알콜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비어마켓에서만 살 수 있었던 해외 수입 맥주도 이마트에 들어와 있었다. 손쉽게 그것을 구할 수 있었고. 심지어 무알콜 막걸리가 탄생해 있었다. ‘수블수블’ 못 잊을 그 이름. 술을 못하니까 술도 맛으로 먹던 나는 막걸리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런 나에게 무알콜 막걸리라니 감동 그 자체였다. 마침 할인도 하던 차 나는 그걸 사서 먹었지. 꽤 막걸리 같았고, 그래도 아침 햇살에더 가까운 맛인데 그렇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참고로 최애 음료 아침햇살임.) 더군다나 철분제 복용으로 변비에 시달리던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맛있어. 갓 구운, 어쩌면 튀겨낸 김치전에 ‘수블수블’이면 세상은 은하수가 되어 반짝거렸다. (지금은 발왕산 막걸리가 출시되어 두 개가 되었다. 수블수블보다 더 청량하다고 함. 아마도 사이다 탄 막걸리 맛, 혹은 밀키스 같을 듯 합니다. 참고하시길.)
몇 개 더 추천해볼까. 나 사실 무알콜 소개하려고 이만치 쓴 거 같은데. 그거 아나요. 무알콜이라고 적혀있어도 알콜 함유가 0.0% 아닌 상품도 있으니 꼼꼼히 보셔야 해요. 또 무알콜은 음료로 취급되어 온라인에서도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답니다. 이상.
- 클라우스 탈러
- 크롬 바커
- 비트버거
- 그롤쉬 논 알콜릭
- 라이틸란 꾸꼬 IPA
- 하이네켄 논 알콜릭
- 르쁘띠베레 모스카토 스위트
- 하이볼 무알콜 칵테일
아이가 생기고 집 밖의 생활을 양껏 즐기지 못하는 소년은 우리 집에서 술판을 벌이기도 한다. 술 마시기 보다 술자리 즐기기에 더 익숙한 나는 다행히 그 과정이 부담스럽지 않고. 마침 게을러 빠진 나는 누군가 집에 찾아와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상태의 청소를 할 수 있으므로 정기적으로 지인들을 초대하고 있다. 때마다 둘째는 자리를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소주병을 노리는데, 어느 날 때가 왔다. 우리가 모두 잠시 정리한다고 정신팔린 사이 기어이 녀석이 찾아와 병나발을 분 것이다. 다행히 소량이었지만, 아이는 병을 놓치고 찬찬히 걸어나와 갑자기 퍽 주저앉았다. 그리곤 뿌앵. 바닥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웃으며 뛰어다니다가 자러 들어가기 직전에 먹은 걸 다 게웠다. 마치 십이 년 전 그날처럼.
“우리 가현이, 수왕 씨처럼 술 취해서 토한 애 토 처음 닦아본 기분이 어때.”
토사물을 닦으며 엄마를 떠올렸다. 옆에 있던 아빠의 표정은 어땠지. 소년 같았나. 소년은 잽싸게 물을 가져와 아이에게 주고 있다. 아이가 컵을 밀쳐내니 이온 음료를 들고 온다. 나는 헛웃음만 나고. 역시 부모가 된다는 건 내가 살며 저지른 업보를 회수하는 일임이 틀림없다. 엄마 아빠 소원대로 내가 꼭 나 같은 애를 낳아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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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스타
이번주도 잘보고 갑니다 술은 역시 맥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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