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 매정한 취향수집

제 23회, 여름

2022.06.03 | 조회 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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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음회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싫어해요. 저는 여름을 정말로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것을 넘어 계절성 우울증이 찾아올 정도로 괴로워요. 어렸을 땐 애써 여름을 좋아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시절에는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라 꼽기도 했고요. 이유는 별거 없었어요. 제가 태어난 계절이거든요. 지금은 그 이유로 가장 싫어하게 되었지만요.

 

어느 순간부터 생일은 정말 귀찮은 일이 되었습니다.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된 때부터겠지요. 생일을 싫어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저와 며칠 차이 나지 않는 유월에 태어난 친구와 함께, 여름과 생일과 여름에 태어남을 죽도록 싫어하기도 하니까요. 유월 첫날, 이미 여름 싫다- 유월 싫다-를 외친걸요. 그리고, 이런 노래도 있어서. 조금 더 마음 놓고 여름을 싫어하고 있어요.

 

 

선우정아 - My Birthday Song

 

 

제 생일이 오면 엄마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너 낳던 날 진짜 더웠는데-' 가끔 뉴스에서 그해 여름의 무더위를 언급하는 걸 보면, 힘든 일을 겪느라 무덥다고 느끼셨던 건 아닌가봐요. 그 무더위를 왜 뚫고 나왔을까요. (농담입니다.)

 

제게 여름은 더위, 생일과 동어(同語)예요. 저는 그토록 무더운 날 태어났는데 왜 더위에 면역이 없을까요? 세상에 첫 숨을 틔운 날의 온도를 왜 버티지 못하는지. 귀여운 동물 친구들은 보통 태어난 계절과 날씨를 잘 이겨내며 살잖아요. 동물은 맞지만 귀엽지 않아서일까요? 아무튼 참 억울해요.

 

생일 같은 거 아무도 모르고 넘어갔으면 싶어요. 가장 간단한 이유는 축하받는 일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무엇을 이룬 것도 아닌데,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축하를 받는 거니까요. 꼭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하루하루 살아내 시간을 쌓는 일은 대견하고 축하받을 일이긴 하지요. 저는 그런 이유로 타인을 쉽게 축하하고, 칭찬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축하받고 싶지 않아요. 생일이면 시간이 흐른 것을 체감하고, 무용(無用)한 삶을 돌이키다 결국 우울해지거든요. 그런 마음으로는 저의 삶을 축하해주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가 어려워요. 솔직하게 고백하면, 고마운 척하며 감사의 언어를 고르느라 주저한 적이 많아요.

 

애초에 SNS를 가까운 친구들하고만 나누고 있긴 하지만, 그곳에 생일이라 올리던 글조차 챙기지 않게 되었고요. 카카오톡에서도 생일을 숨겨뒀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정말 사랑하는 이들의 축하만 받고 넘어갈 수 있더라고요. 나의 생일이라 말하는 것마저 겁내는 사람이 되었지만, 일 년 중 손꼽게 힘든 날을 한결 마음 편히 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생일이면 유독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구독자님은 안 그러신가요? 저는 늘 그래요. 일 년 중 죽음에 대해 가장 오래, 깊이 생각하는 날인 것 같아요. 태어남과 살아감을 기념하는 날이라 그런 거겠죠? 저는 그 둘을 모두 무던히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고요. 생일이 오기 며칠 전부터 조금씩 가라앉고, 생일이 오면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아져요. 여름의 더운 날씨를 탓하며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고 여러번 도망치기도 했어요. 사랑하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있기도 버거워 파란 바다만 만나러 떠난 적도, 비행기를 탄 적도 있답니다. 올해도 도망을 계획하고 있어요. 부디 성공하길 바라주세요.

 

 

여름이란 주제에 날씨만큼 맑고 푸릇한 글을 기대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여름을 좋아하는 척도 할 수가 없어서, 이런 글을 써 보냅니다. 사실 얼마 전, 이미 여름에 대한 글을 한 편 썼어요. 그냥 흘러보내기 아쉬우니 편지에도 덧붙여드려요.

 

 

그렇게 우리는 여름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아도 마지막에 '여름이었다'라는 문장만 더하면 모든 게 낭만으로 포장된다는 농담이 있다. 여름은 대체 무엇이기에 한마디 덧붙이는 것만으로 서사를 만들고, 마음을 일렁이게 할까. 사계절 중 유독 여름이 청춘을 대변하는 듯하다. 여름은 청춘과 닮았다고, 여름이야말로 청춘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시리게 파란 하늘, 신록의 나무, 뜨겁게 빛나는 태양. 이 세 가지만 있어도 무언가 채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여름을 청춘과 열정의 대명사로 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맑고 덥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엔 여름은 길고, 너무 많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무더위와 열대야, 기분마저 잠기게 하는 장마까지. 우리는 여름마다 그 억센 날씨를 이겨낸다. 여름과 청춘의 연결 고리를 찾자면 아마 여기에 있을 거다. 온난했던 계절을 박차고 나오는 더위, 흐르는 땀에 익숙해질 때쯤 더 축축하게 젖어 드는 장마, 해가 저문 뒤 찾아오는 고요하고 서늘한 밤. 여름이 청춘과 닮았다면 푸릇한 생명력보다는 그런 '견딤'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사실 나는 여름을 아주 싫어한다. 더위에 녹다 못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체질이라 시작될 무더위가 두렵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여름의 기억을 톺아보면 낭만이 묻어있다. 모르는 언어의 나라에서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던 여행길, 생일날 홀로 찾았던 상쾌한 강릉 바다. 슬프거나 나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희석되기 마련이다. 다행히 우리 기억력은 기계와 달라서, 강렬하거나 내가 바라는 추억만 골라 남긴다. 기억이 흘러가듯 여름도 지난다. 여름과 닮은 청춘도, 영원할 것 같던 이십 대도 끝이 난다. '여름이었다'라는 말을 붙여 모든 게 낭만으로, 추억으로 남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쓰려고 한다. 우리의 청춘은 여름이었다. 나의 이십 대는 여름이었다.

 

 

 

괴로운 여름도 변함없이 쓰며 버텨보려 합니다. 이겨낼 자신은 없어요.

 

물 많이 드시고, 너무 강한 햇빛은 조심하세요.

매서운 유월의 시작입니다.

 

 

 

정준일 - 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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