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셨나요?
어제는 서울에 눈이 정말 많이 왔어요. 어제 저녁 퇴근부터 오늘 아침 출근, 그리고 조금 전 퇴근까지 (제가 좋아하는) 펭귄처럼 뒤뚱뒤뚱, 조심히 걸어야 했어요.
며칠 전부터 눈이 정말 많이 올 거라는 예보가 있어서, 이번 주 편지 주제를 ’눈‘으로 바꾸자고 했어요. 보통 무엇에 대해서 적어 보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하고 주제 단어를 추려내는데, 이번엔 그냥 무엇이든 눈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눈 취향 사전을 뒤적여 봤는데 마땅한 게 없더라고요. 제게 ’눈 영화‘는 <윤희에게>인데, 일찍이 적어 부친 적이 있어서요. 고민을 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윤희에게>와 닮은 영화가 있다는 게 생각났어요. 같은 일본 오타루를 배경으로 하기도 하고, 어쩐지 비슷한 구석이 많은 영화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편지를 주제로 하는 것이, 우리와도 꼭 맞을 것 같았어요. 사실 저는 잘 몰랐지만요.
<러브레터>의 줄거리도, 일본어도 전혀 몰랐지만 이 말의 뜻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겡끼데쓰.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왜인지 어릴 적부터 여러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말이에요. 그래서 오겡끼데스까-라는 말은 어쩐지 웃어야 할 것 같고,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이 말을 개그로 쓰기 시작한, 누군지 모를 사람을 원망하게 됐어요.
혹시 아직 <러브레터>를 보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편지는 여기서 멈춰주실래요? 아마 저만 처음봤을 테지만요. 저는 어떤 영화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봤거든요.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아서요. 흔히 ‘일본 감성’이라 말하는 로맨스 영화일 줄 알았는데 저의 예상이 제대로 빗나갔어요.
영화의 첫 장면은 추도식입니다. 와타나베 히로코와 결혼을 약속했던 후지이 이츠키의 추도식이에요. 이때까지만 해도 슬프게 끝나버린 둘의 사랑을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1995년 일본에서 나온 영화이니 영화 속 사랑의 주인공들은 남녀일 테고, 첫 장면이 남자의 죽음을 암시한다면 당연히 그 슬픈 사랑에 대해 말할 거라고 단정 지었죠. 뻔할 것 같아 괜히 설레발치며 실망한 채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어요. 다행히도 저의 단정은 틀렸습니다.
후지이 이츠키의 어릴 적 졸업 앨범 뒤편에 적인 주소록을 발견한 히로코는 그곳으로 편지를 보내요. 세상을 떠난 후지이 이츠키에게요. 그때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도로가 놓였다던데, 그곳에 후지이 이츠키는 살지 않는데. 어째서인지 후지이 이츠키에게서 편지를 잘 받았다는 답신이 옵니다.
편지를 받은 이츠키는 히로코의 이츠키가 아닌, 또 다른 이츠키였지요. 영화는 발신인에 대한 착각이 끝나는 순간,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히로코가 직접 오타루를 찾기도 하면서 편지의 정체를, 새로운 후지이 이츠키의 존재를 알게 되는데요. 히로코는 이츠키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후지이 이츠키와의 추억, 그가 달리던 학교 운동장 따위를 물어봐요. 이츠키는 기억을 더듬어 답장을 쓰고, 눈 오는 학교 풍경을 담아 보내기도 하죠.
히로코가 오타루에 들렀을 때 이츠키와 자신이 닮았다는 것을 아주 우연히 알게 돼요.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이츠키가 사실은 또 다른 이츠키를 마음에 품고 있던 게 아닐까 짐작하죠. 히로코에게 별다른 말 없이 첫눈에 반했다며, 처음 본 날 사귀자고 고백을 했었거든요. 히로코의 이야기가 매우 궁금해지지만, 우리는 편지를 적어내려가는 이츠키의 모습을 만납니다. 어릴적 이츠키와 이츠키를 회상하면서요. 그래서 낭만적인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현실의 혼란과는 거리를 두고 과거를 추억하니까요. 지나간 것들은 어떻게든 좋게 기억하고 싶어지니까.
히로코는 이츠키가 세상을 떠난 뒤 사랑하던 시간은 물론, 마음을 잃었을 거예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의 마음도 애써 모른 척 태연하게 대했겠지요. 히로코는 답장의 편지를 보내준 이츠키 덕분에 잃어버린 사랑을 정리할 수 있었을 거예요. 떠나간 이츠키를 추억하며 기억하는 친구들 덕분에, 잃어버렸던 마음을 되찾았을 거고요. 사랑은 물론, 세상을 떠난 이를 온전히 기억하는 법은 그것을 마냥 끌어안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 같기도 합니다. 그를 빼앗아 간 산을 마주 보고 잘 지내냐 묻는 외침은, 나는 잘 지낸다고 외치는 눈물이 비로소 우리를 안심하게 합니다. 이별을 수용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잘 살아가는 거니까요.
이츠키와 이츠키의 추억도 지금에서야 매듭을 짓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통해서요. 살아가는 이츠키가 다시금 손에 쥐게 된, 떠난 이츠키가 책 뒤에 남긴 메모를 발견하기까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서로를 어떻게 기억해왔을까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남자아이가 사실은 날 몰래 좋아했었다는 것. 그 아이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른이라는 것. 내가 모르던 나의 시절은 ‘이름만 같을 뿐‘이었던 아이에겐 첫사랑으로 남아있었어요.
저는 하나의 이야기를 제대로 보았다는 느낌에 엔딩 크레딧 보는 걸 좋아해요. 계단을 내려가듯 여운을 해소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러브레터>의 엔딩 크레딧 중 출연진 이름의 시작은 ‘와타나베 히로코 / 나카야마 미호’ 마지막은 ‘후지이 이츠키 / 나카야마 미호’라는 것 아시나요? 결국 히로코와 이츠키는 시작과 끝, 하나였어요. 히로코와 이츠키, 두 역할을 한 배우가 맡았거든요. 제가 눈썰미가 없는 편이긴 하지만 영화 중반이 되어서야 한 사람이라는 게 겨우 보이더라고요. 그만큼 좋은 연기를 했다는 뜻일 거고요.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시음회 친구들에게 먼저 물어봤어요. 러브레터가 내 취향에 맞을까? 화랑은 ’언젠가 볼 거라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보는 걸 추천. 아예 미룰 거면 60 넘어서 보셈‘이라고 했어요. 이 알 수 없는 답변 덕에 영화를 바로 재생해버리긴 했는데요. 화랑에겐 틀렸다고 말할래요. 난 60살 안 넘어도 좋은데?!
저는 언제까지 이런 영화를 좋아할까요?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떠나보내고. 거기에 조용한 낭만과 유치함이 더해지면 더 좋아요. 60이 넘어서도 뻔한 사랑 이야기를 만나면 ‘이 영화 꼭 보세요’ 하며 편지를 쓰고 있을까요? 이렇게 좋아하는 것 이야기를 한다는 핑계로 안부를 확인하고 싶어요.
영화 대사로 끝맺는 게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뭐 어때요. 안부를 묻는 일은 자꾸만 해도 지치지 않아요.
그럼,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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