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러 신사동에 갔다. 사람 많은 걸 꺼리는 나에게 적합한 예약제의 널찍한 티룸이다. H와 함께 정갈한 티푸드를 나눠먹으며조곤조곤히 한 주간 있었던 일 등의 대화를 하다 보니 두 시간이 참 빨리 간다. 한산한 햇빛과 거리를 걸음과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관찰되는 것들. 평일 오후 두시에 친구를 만나는 일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어제는 M과 꽃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팬들이 품에 한 아름 안겨주는 꽃에 고마움을 담아 포푸리나 플라워 돔을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팁을 알려주자면, 조금이라도 잎을 빨리 떼고, 바로 말려야 더 예쁜 드라이플라워가 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자 내 방 유리병에 담겨있는 지난날 선물 받은 백합이 생각났다. 제 생명을 다하여 물을 머금지 못한 채 서서히 말라가는 내 백합. 나는 꽃이 시드는 걸 바라보는 게 좋다.
처음부터 드라이플라워를 만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때는 오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던 시절이다. 그때의 나는 퍼석하게 마른 꽃 냄새로 가득한 방에 살았다. S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꼭 우리가 싸운 다음날 나에게 꽃을 선물했다. 그러면 나는 그 향기로운 다발을 품에 안고 용서했다. 그게 우리가 화해하는 방식이었고 우리는 무진장 싸웠기 때문에 봄 겨울 할 것 없이 내방은 죽은 꽃들의 도시가 되어갔다.
이별 후 나는 그 마른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헤어진 뒤 X의 물건을 모두 정리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 중에 고르라면, 후자였다. 그를 선명히 떠올리는 것들을 보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때까지, 정말 괜찮아질 때까지 곁에 두고 아파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는그랬고 지금은 아니다.) 그때부터 나에게 꽃은 (불쌍하게도) 괴로운 것을 떠올리게 하는 산물이었다. 때문에 우습게도 나는 아직 날 위해서는 꽃을 사지 않는다. 그것은 심리적인 행위에 가까운데, 계속해서 지켜왔던 약속이 작년 이맘때 유난히 기분이 이상했던 날 깨졌다. 나에게 튤립 화분이 하나 생긴 것이다.
보랏빛을 띠는 튤립이었다. 이제 와 꽃말을 찾아보니 ‘영원한 사랑’, ‘영원하지 않은 사랑’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노란색, 빨간색, 분홍색 튤립도 있었는데 보라색을 받아온 것이 또 재밌는 거다. 한동안 이 튤립을 잘 키워보려고 관찰해가며 극진히 모셨지만 오래가지 못해 시들어버린 건 살면서 가장 오래 키운 것이 치킨을 시켜 먹고 받은 씨몽키가 유일했던 나에겐 당연한 수순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이 꽃이 시드는 것이 많이 슬펐던 것 같다.
9와숫자들의 노래가 생각났다. 곁에 오래 두기 위해 향기와 색을 잃게 하는 일이 꽃이 진정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거다. 가사에 빗대 그때 우리의 관계를 떠올렸다. 아무리 해도 꽃이 천년을 살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제는 꽃이 시들어 가는 것에 슬퍼하기보다는 향기로울 때 더많이 보고 저물어가는 장면을 관찰하듯 새로이 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하고 선물 받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꽃에 대한 내 부정적인 감정도 잘 기억나지 않는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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