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이 아니라 역 앞에서 아이들과 헤어진다. 그리고 기차에 오른다. 재택근무에서 전환된 지 반년, 왕복 한 시간 이십 분의 여정을 거쳐 출퇴근하고 있다. 사람들이 대전까지 오가느냐고 물어보면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수도권에 사는 친구들에게는 일상일 텐데 지방민에게는 아직 도시를 오가는 게 낯설 게 느껴지는가 보다. 집어른들은 화들짝 놀라며 만류하기도 한다. 애를 둘이나 키우면서 일을 하느냐고, 어서 그만두라고도. 일주일에 두어 번, 많으면 세 번. 그간 열차 안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었고, 그러나 여러분이 받아본 글 대부분이 이 시간에 탄생했다.
열차 안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글이 잘 쓰였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이면 항상 편지를 썼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차 안에서는 대개 무어라 쓰고 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울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보통 생각을 했는데, 터무니없는 상상에 가까웠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료한 얼굴이나, 무언가 열중하는 이. 시간을 어서 보내야 하는 자의 발버둥이나, 반대로 흐르는 시간을 내버려두는 사람까지. 이렇게나 많은 표정을 천천히 들여다볼 여유는 살면서 그닥 없으니까. 맨날 보는 뻔한 것들에서 벗어난 데다가 모두가 음소거인, 비현실적으로 소름끼치게 고요한 장면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꼭 무성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나는 16D 자리에 앉아 유일한 관객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플랫폼을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예전에는 좋아했다. 지금처럼 업무 차원의 이동이 아니라 어딘가로 떠나려는 게 목적인 사람이 더 많았던 먼 옛날 옛적의 이야기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적잖이 상기되어 있었다. 영화가 시작될 무렵의 표정으로 말이다.
시골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목에 자리한 기찻길을 그냥 지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꼭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 가야 한다며 선우 만한 가현이는 늘 아빠 차를 멈춰 세웠다. 댕댕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창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내 안에 살아있다. 아마도 차창 안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기억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데에도 기차를 타는 건 좋았다. 어릴 땐 기차 비용도 고가였으므로 대용으로 버스에 오르곤 했다. 고질적으로 앓고 있던 멀미는 버스 여행의 걸림돌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 정도가 부담이 아니게 되었으므로 지역을 옮기는 와중에도 기꺼이 매장에 더 근속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던 것이리라.
코로나 시국으로 적자를 메꿔야 하는 상황이나 그 탓에 인원을 감축해야 했던 사정들. 그리하여 우리가 지키고자 노력해온 것이 사그리 무너지게 됐다. 모든 일이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벌어졌다. 이를 바로 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는 건 내 몫이었다. 덕분에 좋아하지 않는 업무를 하게 됐고, 일하는 내 모습이 퍽 싫어지기도 했다. 보람되지 않다는 건 나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아이라도 울며 등원하는 날이면, 세상에 내가 진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고 사나 싶어 내내 울다가 토끼 눈이 된 채로 매장 앞에 있기도 했다.
어느 곳에 소속되고 머무를 때,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나 기대어 비빌 시간이 꼭 존재해야만 하는 내가 천착할 수밖에 없던 것이 결국 출퇴근 시간이었다. 기차 안에서만이 나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군중 속에서 오롯이 주어지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이런 해방감이 얼마 만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미안함을 동반한 변명을 일삼지 않더라도 나 혼자 누리는 자유의 시간이 지속해서 주어진다니 너무나 소중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버틸 수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정말이지 혼자 있는 시간이 드물었다. 나는 주로 집안에서, 그것도 내 방 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익숙한 인간이었다. 소위 말하는 집순이. 방 안에서 부지런을 떨지 않고,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족히 일주일은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진정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을 만나고는 언제나 둘이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소년과 함께였고, 그와 같이 보내는 집 밖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행복감을 안겨다 주었으므로 그간 어떻게 혼자 밥 먹고, 카페에 가고, 그림을 보고, 산책하는 삶을 살았던 거지 한동안은 자못 의심스러웠다. 그 기억이 가물거릴 때쯤 우리의 인생에 아이가 등장했다. 혼자였던 방안에 사람이 셋이, 또 넷이 되었고 나는 내 자리를 완벽하게 잃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답을 물어오는 친구들에게는 고민도 없이 말했다. 너만의 시간이 아직 너무나도 소중하다면 아이를 가지는 일은 조금 유보해도 괜찮다고. 아이 계획을 말하는 연인에게도 말해주었다. 두 분의 시간을 아직 붙잡아두고 싶으시다면 조급해하지 마시라고. 제 생각에는 둘이서 극장가기가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정도는 되어야지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귀하게 여기며 충분히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실이고, 현실이다. 말로만 들어서는 영영 알 수 없지만, 나에게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당장 눈앞의 일을 그들은 몰랐다.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들렀던 극장과 일 년에 두세 번은 누렸던 공연장은 고사하고, 아이가 자라는 내내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다. 거짓말 안 하고 삼백 번쯤 본 영화를 또다시 틀어놓고 코까지 덮어진 이불의 향기를 맡으며 빼꼼 내민 두 발에 내려앉는 시원함을 느끼는. 나 혼자만 침대에 누워 서서히 오는 잠을 맞이하는 밤은 더는 내게 없다. 소년의 품까지는 못하더라도,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정말 가끔 붙이는 쪽잠이 집에서의 밤잠보다 안락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하다못해 쓰레기를 버리러 가지도, 요 앞 마트나 커피를 사러 잠시 다녀오는 일도 할 수 없다. 화장실도 일일이 말해주고 다녀오는걸. 거의 보고에 가깝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들은 금세 또 나를 찾으니까. 그새 겁먹은 표정으로 빨간 눈이 되어서 나타나니까. 알아듣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말은커녕 걷지도 못하는 시절에는 아이를 안은 채로 변기에 앉는 일이 허다했다. 이건 진짜 아니다 싶어 보행기나 점퍼루를 앞에다 옮겨 놓고선 활짝 문 연 채로 있을 때면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이런 삶 살고 있는 거지, 믿을 수 없어 서글프다가 이내 안쓰러워졌다.
아이와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에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문을 닫고 숨 고를 시간도 아이는 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아주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말해도 아이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면 정말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얼굴도, 심장도. 이미 나는 마지노선에 도달하여 평정을 지킬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고,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이 앞에서 목놓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참아내었던 울음이 기어이 터져버린 날이면 아이는 자기가 울던 것도 뚝 그치고 한참 나를 바라봤다. 울음이 멎고 나면 자제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한참 멍하게 있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놀란 아이만큼이나 나도 나한테 놀라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선우가 나에게 먼저 사과라도 하는 날이면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제발 혼자만의 시간을 절실하게 바랐다.
엄마들의 시간을 안다. 세탁기나 건조기 옆에서 숨죽여 우는 언니. 아이가 낮잠이 자기를 기다려 내게 전화를 해 열변을 토하는 동생과 엄마 얼굴을 보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애 보는 게 너무 힘들어도, 엄마가 도와준다고 말하는 데도 친정엔 못 가겠다 말하는 친구가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직업을 지웠으므로 나로 사는 시간보다 엄마로 살아가는 시간이 훨씬 많은 여자들. 부쩍 출퇴근 길에 그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대로 쭉 달려서 서울의, 김해의, 대전의 엄마들을 꼭 안아주고 싶단 상상을 하면서. 나도 겨우 가졌지만, 기차 안의 한 시간 이십 분조차 주어지지 않는 당신들의 하루를 그려보며. 빛나던 그녀들의 모습을 내가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아이가 많이 자라서 엄마는 조금 미뤄두고 다시 나 자신으로 세상에 나서고 싶어지는 날에 내가 용기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아이들 앞이다.
노오란 셔틀 버스 뒷모습이 저멀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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