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물과의 인터뷰

그리고 정치학자 김지윤

2024.02.23 | 조회 2.17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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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운의 사고실험

계속 질문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0  김지윤 박사님의 모습을 처음 미디어로 접했던 건, tvn [월간 커넥트]에서 진행하셨던 '버락 오바마' 인터뷰 편이었습니다. 제가 EO 입사해 인터뷰를 직업으로 삼은 1 남짓 되었을 때입니다

1  당시의 저에게는 나쁜 관념이 하나 박혀 있었으니, 소위 제가 인터뷰하는 분체급 높아지는 것이 곧 제 성장의 척도라고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관념이 제 커리어의 초반 성장을 빠르게 이끌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 지금은 왜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그 인해 발생했던 부작용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언젠가 다음 기회에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2  아무튼 오바마 전 대통령이라니. 한국 교양 프로그램에서 모실 수 있는 게스트 중에서 그보다 '체급'이 높은 사람은 드물겠죠. 만약 내가 저런 거물을 인터뷰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오바마도 오바마지만 지윤님의 인터뷰 스킬이 궁금해서 썸네일을 눌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인터뷰는 기대 이상으로 유익하고 재밌었습니다. 특히 '개인의 신념과 미국의 국익이 충돌하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던 순간'에 대한 지윤님의 질문은 - 정말이지 퇴임한 미국 대통령, 그중에서도 오바마를 상대로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3  시간이 흘러 저 역시 점점 더 많은 '거물'들을 인터뷰하면서, 새삼 그 인터뷰가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 더욱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뷰의 깊이는 결코 인터뷰이의 체급과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느 시점부터는 반비례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평소 인터뷰 장르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인터뷰를 봤더니 이름값에 못 미치는 내용이어서 실망하셨던 경험이 분명 있을 텐데요. 이유를 진단해보면 대강 이렇습니다.

4  첫 번째로, 거물은 물리적으로 허용된 인터뷰 시간이 짧습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재작년에 갔던 실리콘밸리 출장에서 나스닥 상장사 대표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시간의 압박에 얼마나 취약한지 뼈저리게 느꼈는데요.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거물들의 시간은 15분 단위로 관리되고, 미디어와의 인터뷰에 1시간 이상을 할애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운이 좋아 1시간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1시간이 아닙니다. 앞 일정이 늦어져서 인터뷰이가 10분 늦게 도착할 수도 있고, 거기서 촬영 세팅을 인물에 맞춰 조정하고 마이크를 채우느라 5분을 더 쓰고,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어영부영 몇 마디를 주워넘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40분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수백 번의 인터뷰로 훈련된 미디어용 미소 너머를 들여다보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죠. 

5  두 번째는, 거물을 인터뷰하는 나 자신에게 감격한 나머지 내용의 좋고 나쁨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저보다 거물들을 훨씬 많이 만나본 EO 김태용 대표가 팀원들에게 자주 환기시켜주는 내용이기도 한데요. 이 문제를 회피하는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열성적인 시청자라고 하더라도, 콘텐츠를 볼 때 지금의 나 자신보다 더 감격한 상태일 수는 없습니다. 인터뷰이와 나 사이에 설정해 둔 마음의 거리가 얼마이든 거기서 최소 두 발짝은 물러서야 합니다.

6  세 번째는, 앞의 두 번째 이유와 양의 상관관계를 가지는데요. 거물을 감동시키기 위한 사전조사에 몰입한 나머지 시청자 입장에서 지나치게 고맥락인 내용이 담기는 경우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개인들의 관심사가 파편화된 시대에는, 한 분야의 최고 거물이 누군가에게는 동네 주민 정도의 존재감을 갖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충분한 사전조사를 통해 빠르게 인터뷰이의 신뢰를 얻는 일은 중요하지만,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시청자를 대화의 맥락에서 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역시 제가 자주 저질렀던 실수이자 지금도 매번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7  마지막으로는, 거물일수록 그의 발언에 걸려 있는 이해관계의 무게가 크다는 점입니다. 상장사의 대표라면 자칫 말실수를 했다가 주가에 영향을 끼칠 위험을 고려해야 하고, 미국의 전 대통령이라면 한-미 동맹 관계에 의도치 않게 개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죠. 사실 이 문제는 인터뷰어의 통제 바깥에 존재하기에 미리 인지하는 것 이상의 대응을 하기는 어려운데요. 그렇지만 위의 모든 요인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실패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8  [사고실험] 얘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매번 사설이 길어지네요. 저 스스로 제 글쓰기 역량에 대한 객관화와 기대관리를 해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빠르게 1부 영상 뒷풀이를 이어가보겠습니다.

9  시작부터 외람된 이야기지만, 지윤님께서는 사실 '인터뷰공학적' 측면에서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인터뷰이셨습니다. 영상의 첫 문답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스스로를 멋진 말로 포장하는 걸 무척 꺼리는 분이셨거든요. 특히 느끼한 멘트를 견딜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빵 터지면서도 한편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인터뷰 스타일은 좋게 표현하면 섬세하고 진지한 쪽이지만, 한번만 발을 잘못 뻗으면 곧바로 느끼함의 영역에 진입해버리고 마니까요.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는 분들도 계실 테고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습니다.

10  그래서 이번 영상에는 평소라면 편집에서 잘라냈을 부분을 하나 남겨뒀습니다. '어쩌다 보니'의 답변을 해체하기 위한 추가질문과 티키타카 부분인데요. 원래 그런 부분은 정보량이 많지 않아서 빼고 가는 게 더 자연스럽고 밀도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우지 않은 이유는, 이번만큼은 지윤님의 답변이 처음부터 물 흐르듯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호스트의 질문을 한 번은 경유해서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11  왜냐하면,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던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로소 꺼내진 말보다 더 단단하고 진실하게 들리는 언어는 없으니까요. 

12  편집을 하는 동안 마음속에서 '질주 구간'이라고 이름 붙였던 구간이 두 군데 있습니다. 지윤님이 영상 중반부에서 '노력'에 대해, 그리고 후반부에서 '달리기'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간입니다. 각각 3분 정도 되는, 길다면 긴 구간인데요. 눈치채셨겠지만 그 두 개의 구간에서 저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단단하게 질주하는 말에 압도당한 채 계속해서 고개만 끄덕거립니다.

13  먼저 호스트로서 답변이 끝나면 이어가려고 준비했던 질문을 잊어버립니다. 다음으로 PD로서 머릿속에 항상 담아두던 편집점에 대한 생각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다 잊어버리고 나면 마침내 첫 번째 시청자의 자리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제 일을 가장 잘 해내는 순간이 곧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이라는 역설은 전혀 저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질주하는 말의 등에 실린 채로 휙- 휙- 지나치는 풍경에 감탄하기도 바쁘거든요.

@cloud.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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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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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문장

    0
    2 months 전

    글이 너무 좋네요. 항상 응원합니다!

    ㄴ 답글
  • 남웅

    0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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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 알맹

    0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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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짱구는목말러

    0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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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릭스데닉스

    0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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