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외와 가치제안

그리고 회계사 이재용

2024.02.16 | 조회 2.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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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운의 사고실험

계속 질문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0  제가 대학생활 동안 가장 애정을 쏟았던 활동은 연극입니다.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크지 않은 규모의 단과대 동아리였지만 신기할 정도로 진심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제 20대의 절반 이상을 보냈습니다.

1  연극 동아리의 모든 활동은 공연일을 중심으로 짜여집니다. 저희는 매년 5월과 11월에 사흘씩 공연을 올렸습니다. 매일의 저녁공연이 끝나면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자연스럽게 뒷풀이 장소로 이동합니다. 주된 대화 소재는 그날의 공연입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대사를 틀렸고, 누군가는 반드시 소품을 망가뜨렸고, 누군가는 기가 막힌 애드리브로 상황을 모면했습니다. 최소 6개월 이상 킬킬대며 웃을 에피소드들이 그날 만들어집니다.

2  그 방에서 오간 이야기는 객석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뒷풀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영영 듣지 못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몰라도 공연을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잡담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다음날에도 공연이 끝나면 동아리원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뒷풀이에 갑니다. 오래된 술집의 구석에서, 우리들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을 주고받기 위해서.
 

3  그러니까 이 레터는 일종의 [사고실험] 뒷풀이 장소입니다. 2024 시즌 첫 영상에 달아둔 고정댓글에서, 저는 이 레터를 뉴스레터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고 적었습니다. 그건 기대관리 차원의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하고 세련된 사람들이 열성을 다해 만드는 뉴스레터가 너무 많아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무대에 설 생각을 하면 아찔해집니다. 제 본업은 영상이고,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일주일에 3-4시간짜리 부업이니까요.

4  그러니 다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오직 여기에서만 열리는 [사고실험] 뒷풀이입니다. 반드시 유익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름 마이너한 재미가 있습니다. 술은 자유, 불참도 자유, 끝나는 시간은 제 마음입니다.

5  지금은 2월 16일 금요일 새벽 1시고, 저는 약 2시간 전에 이재용님 2부를 발행했습니다. 초반 수치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사고실험] 발행은 동일한 요일에 진행하고자 합니다. 매주 목요일 밤에는 영상이 올라가고 금요일 오후에는 레터가 발송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한 일정 변동이나 휴지기에 대한 계획은 사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6  영상을 발행한 밤에 레터를 쓰기로 한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몇 번 해보면서 루틴으로 만드는 수밖에요. 굳이 촉박한 기한을 설정한 이유는 1) 어차피 영상을 발행한 날에는 아드레날린 수치가 높아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2) 이때가 아니면 쓸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저는 글을 쓸 때 시간을 굉장히 많이 소요하는 타입이어서, 다른 업무와 병행하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러니 영상 발행 다음날 레터를 발송하겠다는 건 반드시 의식의 흐름으로 써내고 말겠다는 다짐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글의 퀄리티가 다소 들쭉날쭉하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7  사설이 지나치게 길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상과 재용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8  사고실험 2024 시즌을 준비하면서, 작년과 가장 다르게 설정한 점은 섭외 방향성입니다. 올해는 각 분야의 지식인이나 크리에이터분들을 모시는 비율을 높이기로 했는데요. 작년의 경우에는 게스트 8팀 중 7팀이 창업가분들이었습니다. 타일러님도, 지올팍님도, 미스치프분들도 모두 본인들이 창업한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나와주셨었죠. 작년 게스트분들 중에서 회사의 대표가 아닌 분은 딱 한 분뿐이었습니다. 송길영 박사님.

9  송길영 박사님 에피소드가 [사고실험] 사상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지적 대담으로서 고유한 재미와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만이 [사고실험]의 본질이고, 그 외에는 게스트가 어떤 직업으로 호명되고 어떤 분야에 속해 있든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습니다. 모든 조건을 떼고, 순수하게 제가 모시고 싶은 지식인/크리에이터 분들을 리스트업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망상 리스트.

10  재용님의 성함은, 처음부터 저의 망상 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숫자를 가장 쉽고 재밌게 설명하시는 분. EO와 시청자층이 일부 겹치는 '머니그라피'와 '언더스탠딩'에서 이미 단단한 팬덤을 보유하신 분. 하지만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재용님 입장에서 굳이 [사고실험]에 출연하실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었죠.

11  섭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제안입니다. 진정성도 중요하지 않냐고요? 물론 중요하지만, 저는 진정성을 일종의 휘핑크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출연을 통해 게스트가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선명하지 않다면, 과한 진정성은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네, 과거의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12  일반적으로 유튜브 토크쇼의 가치제안은 3가지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1) 구독자(매체력) 2) 호스트 3) 돈입니다. 1)에는 출연을 통한 유명세나 홍보효과가 포함될 테고, 2)에는 호스트의 네임밸류나 인맥, 입담이 포함되겠죠. 그리고 2)는 1)을 어느 정도 담보하기에,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호스트 파워를 갖고 있습니다. [나불나불], [피식쇼], [짠한형], [차쥐뿔], [냉터뷰]...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정점에 있는 [핑계고]에 이르기까지. 

13  지금까지 [사고실험]은, 아니 EO채널 전체가 2)와 3)에는 기대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작년의 게스트분들이 대부분 창업가였던 이유도, 창업가분들은 보통 회사를 알리고 싶은 니즈가 있기에 1)을 통해 드릴 수 있는 가치제안이 상대적으로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재용님에게도 1)이 통할 수 있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의 마음으로 재용님의 SNS 계정을 염탐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작성하신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목은 '2023년 소회와 2024년 계획'.

14  "대략적으로 저는 한해 동안 인풋 대비 아웃풋을 58% 대 42%의 비중으로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중은 적절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죠.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준은 7대3 입니다. 뱉어내는 말들이 주워 담는 생각보다 많아지면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24년에는 아웃풋을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근래 많은 제안들은 죄송하지만 대부분 고사하고 있습니다."

15  아뿔싸.

16  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짠 결과, 제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사고실험] 출연을 아웃풋이 아닌 인풋으로 느끼시게 하는 일. 성의껏 작성한 질문 몇 개를 메일에서 바로 읽어보실 수 있도록 넣고, '올해 책을 쓰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번 출연을 통해 독자의 예상 반응을 알아보시면 어떠냐'는 억지도 부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지금껏 받아본 가장 따뜻한 회신이 도착했습니다. 재용님 동의 없이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결코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7  촬영 당일, (1부 초반에 나오는) 재용님이 제 섭외메일을 칭찬해주실 때만 해도 속으로 약간 우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략이 정말 통했구나. 하지만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어제 발행된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들으며 저는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8  아까 위에서 토크쇼의 가치제안은 1) 구독자 2) 호스트 3) 돈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요소가 존재합니다. 출연자의 선의.

19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메시지를 굳이 타인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럼으로써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 진심의 크기는 처음부터 가치의 줄자로는 잴 수 없는 것일 겁니다. 제가 재용님의 선의를 사전에 짐작할 수 없었던 것처럼요.

20  그러니까, 살면서 일어나는 멋진 일들은 대부분 우리 힘만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닙니다. 온전히 제 힘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순간도, 이번처럼 행운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도 모두 존재합니다. 섭외에 성공한 게 온전히 제 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저는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열 배는 더 귀하거든요. 

 

(추신 : 원래 오늘 오후 중으로 발송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시간과 분량 조절에 완벽하게 실패해버렸네요... 다음번에는 이보다 짧게 쓰리라 다짐합니다. 혹시 아직 재용님 2부를 안 보셨다면 꼭 봐주시고, 재밌었다면 주변 분들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럼 주말 잘 보내시길!)

@cloud.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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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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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띵크빅

    1
    3 months 전

    안녕하세요, 이재용 회계사님은 '언더스탠딩'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회계를 한 번 관심을 가져볼까?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쉽고 재밌게 설명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이번 영상을 보면서 재용님은 숫자와 관련한 주제 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도 말을 참 잘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대하는 자신만의 가치관, 철학, 태도, 전략 등이 확립되신 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책을 내주신다면 꼭 구매해서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운님의 전략도 명중한 것 같습니다. 잠시 방송을 쉬겠다고 말씀하셔서 당분간 못보겠구나 했는데, 어느날 알고리즘으로 떠서 봤는데 초반에 재용님께서 성운님의 질문이 너무 좋아서 마지막으로 출연하셨다는 것을보고 어떤 질문과 전략으로 접근하셨을까? 라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신 성운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언젠가 돈과 명예를 떠나 재용님처럼 선의를 갖고 저의 지식과 메시지를 공유하는 날이 오도록 열심히 제게 주어진 위치에서 버티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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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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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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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ileey

    0
    3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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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비딩

    3
    3 months 전

    우연히 뉴스레터를 보고, 신청한 일이 행운이라 여겨질 정도로 완벽한 뒷풀이였어요. 17번을 읽는 순간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재용님의 2부 영상을 보고서 느꼈던 형용할 수 없었던 감명을, 완벽히 문장으로 설명해주신 덕이었을까요? 성운님의 사고실험을 보며 늘 경험했던, 사고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질문이 이끌어가는 영상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렇게 글로써 생각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경험까지도 얻게 해주시니 무척이나 충만한 기분이 듭니다. 늘 열심히 구독하고 있어요. 항상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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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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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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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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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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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ikang4

    0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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