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나는 늘 집 바로 뒤 운하를 따라 달리기를 한다. 운하를 끼고 달리다보면 물과 풀이 어우러진 자연이 나를 반겨준다. 조금 더 달리다보면 맨체스터 시티 에티하드 경기장이 웅장하게 서있다. 반갑고 놀라운 지점들이 가득한 달리기 코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 중 하나는 300m 정도 되는 어두운 다리 밑이다. 이 다리 밑을 지날 때면 세상에서 따로 떨어진 느낌이 든다. 오직 내 호흡과 움직임에 집중하게 된다. 갈비뼈 가장 아래 공간까지 들어오는 들숨의 포만감과 그 숨이 다시 날숨으로 나가며 느껴지는 후련함이 또렷해진다. 발바닥 앞쪽으로 땅을 박차며 통통거리며 뛰어오르는 가벼움도 선명하다. 얼굴에 맞는 바람은 시원한 소리를 낸다.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나의 소리에 빠져들게 된다. 그 리듬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그 때 달리기는 황홀하다. 세상과는 떨어졌지만 나와 가장 가까운 채로 움직인다.
어두움이 지나고 터널 밖 밝은 곳으로 나갈 때 내 모든 감각은 다시 밖으로 향한다. 오른쪽에는 길고 넓게 운하가 흐르고 있다. 그 위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오리와 거위들이 시선을 가로챈다. 어떤 애들은 서로 술래잡기를 하고 있고 어떤 애들은 고개를 꺾고 운하 변에서 잠들어있다. 왼쪽을 보아도 형형색색의 나무와 풀들과 사람사는 건물이 번갈아 나타나 시선을 가로챈다. 지나가던 갈색 푸들이 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게 되고, 메탈을 꽤나 하시는 락밴드가 연습하는 소리에 5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게 된다. 가끔씩 누군가 빵을 던져서 모인 비둘기 떼 사이를 헤쳐 지나가며 얼굴을 찌푸리기도 한다.
내 안에서 느껴지던 감각들은 금세 둔해진다. 동시에 나의 리듬을 잃는다. 왠지 모르게 느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리가 조금 더 무겁고 호흡이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 든다. 다시 감각을 내 안으로 돌리려고 해도 바깥 세상이 나를 유혹한다. 주변을 보며 궁금해할 수 있고, 평소에 미처 다하지 못한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지만, 달리기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황홀은 없어진다. 나와의 연결은 점점 느슨해진다.
요즘 나는 마주치는 것들을 줄이려고 하는 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움직이고 모이는 연구실에서 벗어나 집에서 집중하며 일을 하고 있고, 평소에 따로 사람을 만나는 빈도를 줄이며 혼자만의 시간을 더 가지고 있다. 손쉽게 온갖 정보와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이 시대에 일부러 내게 들어오는 인풋들을 줄이고 있다. 음식도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먹기보다 내 손으로 재료를 골라 정성스럽게 만들어 먹는다.
그 덕분에 내가 하는 연구에서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여 더 좋은 아이디어와 결과를 내고 있다. 만나는 사람을 줄이니, 다른 사람의 말보다도 자신과 솔직한 대화를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만날 때에도 더 솔직한 모습으로 나가서 만남이 더 기쁘고 즐겁다. 내가 원해서 선택한 정보와 자극만 받아들이니 더 유익하고 신난다. 좋은 재료들로 손수 만든 요리를 먹으니 늘 달고 살던 배아픔이 사라졌고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지금 시대는 온통 밝다. 심지어 밤에도 밝다. 도시의 밤은 쨍하다. 고요한 어두움을 찾기가 어렵다. 세상은 지나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나와 관련이 없는 연예인의 가족에 어떤 불상사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원하지 않아도 핸드폰 스크롤을 조금만 내리다보면 알 수 있다. 마음의 연결이 끊어져버린 친구가 여행을 가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인스타그램 화면 맨 위 동그라미를 누르다보면 볼 수 있다. 보고 싶지 않아 피하려하지만, 조금만 실수하면 어느샌가 그 화면으로 넘어가버려 이입해버리고 만다. 어느새 내 마음은 만인의 놀이터가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도록 밝은 세상 속에 사는 나는 어두움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메탈리카 뺨치는 락밴드가 만들어내는 무자비한 리듬이 아니라 경쾌한 발디딤이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운 리듬을 즐기게 하는 어두움. 눈을 깜깜하게 해서 숨을 느끼게 하는 어두움. 바쁘고 분주하며 느끼는 공허함이 아니라 일에 순도 높은 집중을 하게 해 보람을 느끼게 하는 어두움.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누리게 하는 어두움을 원한다. 이 글도 깜깜하게 어두운 다리 밑에서 탄생했다.
어두움은 빛을 밝혀주는 빛이다. 빛이 없어 밝지 아니한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빛이 없기에 빛을 밝게 하는 반전이 있다. 빛다운 빛을 보려면 어두움이 간절히 필요하다. 어두움이 없이는 가짜 빛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노란 전등에 꼬여버린 불나방들 처럼 정신없이 달려들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 어두운 밤에. 당신은 어떤 빛을 쫓고 있는지, 당신에게 어두움은 무엇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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